<시정잡배의 사랑> / 허연 / ≪세계의문학≫ 2005년 봄호
시정잡배의 사랑
시정잡배에겐 분노가 많으니 용서도 많다. 서늘한 바위절벽에 매달려
있는 빨갛게 녹슨 철제 계단 같은 놈들, 제대로 매달리지도, 끊어져 떨
어지지도 못하는 사랑이나 하는 놈들, 사연 많은 놈들은 또 왜들 그런지.
소주 몇 병에 비오는 날 육교 밑에 주저앉는 놈들. 그렁그렁한 눈물 한
번 비추고 돌아서서 침 뱉는 놈들. 워낙 쉽게 무너지는 놈들. 그러고도
실실 웃을 수 있는 놈들. 그들만의 깨달음이 있다. 시정잡배의 깨달음.
술국 먹다 말고 울컥 누구의 얼굴이 떠오른다. 가물가물하지만 무지 아
팠다. 죽을 만큼 아팠다. 그 술국에 눈물 방울 떨어뜨리고 또 웃는다.
잊어버리는 건 쉽지만
다시 떠오르는 건 막을 수가 없다.
그게 시정잡배의 사랑이다.
마지막으로 십팔번 한 번 딱 부르고 죽자.
[감상]
투박하고 감정을 속이지 않는 시정잡배의 사랑을 통해 우리네 삶을 되돌아보게 하는 시입니다. 무기력하게 망가진 그들의 삶 속 어딘가에는 한때 피 끓는 사랑이 있었다는, 그리하여 그들이 지금 견디는 세상은 그 사랑에서 비롯될 수 있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이 시가 갖는 에너지는 마지막 연의 통렬함에 있습니다. 막무가내로 대책 없을 듯싶은 이 말에 울림이 오는 건, 웃기긴 한데 웃을 수 없는 시정잡배의 진정성 때문은 아닌지… 목청을 돋우는 그의 노래가 들리는 것만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