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숙의 날들> / 박홍점 / ≪시안≫ 2005년 봄호
노숙의 날들
둥근 롤러가 빠져버린 의자가 아파트 울타리 옆에 있다
롤러가 빠졌기 때문에
단란한 웃음소리를 체온을 떠나왔을 것이고
눈, 비를 맞아야 할 것이고
햇빛이 바람이 주인 없는 고양이가 몽글몽글 앉았다, 가기도 한다
오월이 오면 줄장미가 밤낮으로 향기를 보내올 것이고
젖망울이 생기기 시작하는 소녀가
가슴에 발을 담그고 끈을 조여 매고 간다
롤러가 빠졌기 때문에
묵은 종이냄새 스탠드 불빛 같던 밤들과 이별했을 것이고
덩달아 지붕이 벽이 창문이 허물어졌다
아이들 재잘거림이 스쳐지나가고
블레이드를 신은 발들의 무한질주
올림픽스포츠센타 김경희소아과 생각하는수학페르마 빛과선심미치과 같은,
한없이 굴러가는, 굴러가는 공중의 바퀴들
한켠에서는 통닭들이 꿰어져 저물도록 빙글빙글 돌고 있다
더 이상 무게는 없다
롤러가 빠졌기 때문에
구근처럼 둥글게 몸을 말아 침낭 속으로 기어들 듯
몸에서는 뿌리가 돋아난 것이며
애초부터 여기 있었던 듯 도시 속의 정물이 되었다
잠시 멈추었다가 다시 속도를 매다는 일상의 바퀴들이
지축을 울리며 지나간다
몸이 독감을 앓듯 흔들리고 있다
한때는 시간에 속도에 목숨 걸고 매달린 적 있었을 것이다
이따금 눈빛들이 지나쳐가며 힐끔거린다
[감상]
여기 버려진 것에 대한 또 하나의 시선이 있습니다. 롤러가 빠져버려 더 이상 쓸모가 없는 의자. 그러나 이 시의 이면에는 <속도>에 대한 깊은 사유가 숨어 있습니다. 속도는 움직임이고 움직임은 다시 말해 변화입니다. 그 변화를 민감하게 하는 것이 시간일 것이고요. 그래서 한 자리에서 벗어나지 못한 의자에게 움직이는 것들은 속도요 변화요 시간입니다. 그러나 유행 같은 그것들로부터 이탈하는 순간, 힐끔거리는 시선을 받아야합니다. 일상에서 소외된다는 것이 무엇인지, 왜 우리는 <시간에 속도에 목숨 걸고 매달>려 와야 하는지 곰곰이 생각해보게 하는 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