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쏭달쏭 소녀백과사전》 / 이기인/ 《창비시인선》(근간)
해바라기 공장
촛농을 삼켜버린 불빛,
일기의 맨 마지막 이야기는 너무 외롭다는 것이고
너무 외롭다는 것은 소녀의 얼굴에 박힌 주근깨처럼 너무 많았네
어디, 깨진 거울을 좀 보자
어제 본 해바라기도 주근깨가 많은 소녀를 닮았네
그 해바라기도 일기장만한 큰 잎사귀로 서서 온종일 울었네
인부들의 겉옷이 해바라기에 걸쳐 있는 동안
해바라기는 인부의 아이를 닮았네
밤새 고개를 숙인 해바라기 앞을 지나서
소녀들 눈 비비고 공장 속으로 들어가버린 후,
해바라기는 얼굴을 들었네
공장 근처에서 서성거렸던 인부들아 날 좀 보렴, 보도블록은 다 깔았니,
가끔은 먼 친척처럼
잎사귀를 흔들었던 해바라기를 지나서 온 얼굴
밤늦게 일기 속으로도 들어오고
오늘 공장 가는 길에 새로 깐 보도블록 때문에
해바라기......죽었다고 쓰기도 하네
길바닥에 누운 해바라기의 주근깨를 오래 잊지 못하네
공장 가는 길목에 이제 누가 손 흔들어주나
[감상]
해바라기에서 여공인 주근깨 소녀로, 주근깨 소녀가 인부의 아이로, 인부들이 깐 보도블록에 죽은 해바라기가 다시 여공으로 되돌아오는 순환은 자본주의의 구조적 억압을 보여줍니다. 인천 학익동에 방직공장이 있던 시절을 그린 시라고 쓰여 있군요. 비유에 진정성이 서려 있어 느낌이 좋습니다. 종종 발표된 시를 묶어 언제 볼 수 있나 싶었는데 반가운 소식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