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우록》 / 유종인/ 《문학과지성 시인선》
무대
비가 내린다. 여자는
창가로 천천히 걸어간다. 기울어지듯
모든 것은 다가온다. 빗소리를
먼 박수 소리로 잘못 듣는 여자에겐
추억도 찾아갈 무대와 같은 것일까
아픔을 떠올리는 뿌리, 시간은
불구의 길을 오래 걸었다. 그것은
가장 그럴듯한 복원으로 가는
몇 안 되는 계단이다
그때 여자는 몇 계단을 밟아
가장 빛나는 무대에 섰던 소프라노였는지도
모른다. 가장 절정에서 그녀는
자신의 생을 몰랐다. 빛에 둘러싸였으나
그 빛은 어둠이었다. 자신보다 먼저
관객의 박수 소리가 그의 시간을 소나기처럼 적셨을 따름이다
이제 그녀의 무대는 낡은 수집이 돼버렸다.
손님들은 가끔 풀린 눈빛으로 그녀의 전생까지도 궁금해하지만
그녀는 기억의 틀니조차 제대로 끼울 수 없게
손이 떨려올 때가 있다. 가끔 알 수 없는 슬픔이
그녀의 목청을 울려보지만 그녀는 입을 열지 못한다.
끌어 모을 수 있는 관객은 침묵뿐이다
침묵은 눈길을 안으로 끄는 소리일 뿐
박수를 치는 빗소리들, 환영의 넓은 무대로
그녀는 쓸쓸히 유배될 뿐이다. 그녀는
불구의 끝에서 너무나 많은 시간을
되찾아가고 있었다
[감상]
허름한 카페의 늙은 여주인이 창가에 기대어 듣는 빗소리, 어두운 무채색으로 짙게 드리워집니다. <빗소리>를 <먼 박수 소리>로 듣는 추억은 <가장 빛나는 무대>로 걸어가 그녀의 정체성에 이릅니다. 시간의 보폭과 길이가 기억 속에서 만들어지듯, 덧없이 흘러간 시간이 <소나기>에 오버랩 되어 밝음과 어둠, 박수와 침묵으로 되돌아 나옵니다. 가장 밝았던 <무대>의 시절에서 점점 멀어지면서 감명은 줄고, 기억에 빈틈이 생겨 시간도 빠르게 흘렀겠지요. 망각의 긴 어둠 속 드문드문 켜진 불빛과 같은 그곳에 한사코 불빛을 켜두고 찾아가고 있는 그녀의 고단한 회상이 절절합니다.
밝음에서 어둠, 박수와 침묵
화려한 젊은 시절, 틀니조차 제대로 끼울 수 없는 현실
빗소리가 너무 쓸쓸하게 들려옵니다
그 화려한 과거가 현실을 더 쓸쓸하게 보이게 하는....
마음이 가라앉습니다
왠지 착찹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