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모자를 쓴 사내〉/ 문신/ 2004년 《세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빨간 모자를 쓴 사내
바람이 불어 흔들릴 때마다
빨간 모자를 쓴 사내, 제 발 밑에 구름 떠 있는 줄 모르고
휘이익- 휘파람을 불었다 옆구리에 걸어놓은 물동이에서
비눗방울 몇 개 비명처럼 날아오르고
그래도 믿는 건
하늘 어디쯤 매달린 동아줄 한 가득
그는
먼지 앉은 유리창을 힘주어 닦는다
언제나 아래로만 내려가는 삶
더러는 윤기 나는 생활을 꿈꾸기도 하면서 그 사내
삶과 죽음의 경계를 닦는다
세상의 얼룩은 찌들어만 가는데
삶은 왜 이렇게 가벼워지기만 하는 걸까
닦고 또 닦아도 선명해지지 않는 얼굴이 있어
가만히 들여다보면
거기, 간신히 매달려 있는 낯선 사내 울 듯 말 듯
그 사내 서둘러 마른걸레로 훔쳐낸다
누가 그에게 동아줄을 내려주었을까
가끔씩 허리를 묶은 동아줄을 확인하면서···· 제 삶을 확인하면서
그 사내
비눗방울 같은 휘파람을 분다
또 한번 줄을 풀고 내려가면
거기에도 흐린 얼굴 하나 떠 있을 거야
흔들리면서 그 사내 바람이 된다
걸레질을 멈추고
잠깐 생각의 끈을 놓았을 뿐인데
빨간 모자를 쓴 사내
어느덧 구름 위에 떠서···· 휘파람처럼 메아리 없이 떠서
그의 삶처럼 습기 많은 먹구름을 닦고 있다
[감상]
고층빌딩 유리창을 닦는 사내에 대한 이야기가 꾸밈이 없습니다. 허공의 발 아래 아찔하게 내려다보이는 차와 사람들, 사내는 이 현기증 나는 일상을 가느다란 외줄에 의지한 채 닦아냅니다. <닦고 또 닦아도 선명해지지 않는 얼굴>로 이어지는 내면과의 조우가 남다릅니다. 요즘 불편하고 어색한 시를 생각하다가 이런 시를 읽으면 마음이 한없이 고즈넉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