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전거, 이 강산 낙화유수〉/ 최을원/ 2002년 《문학사상》으로 등단
자전거, 이 강산 낙화유수
길가 철책 너머, 오래 방치된 자전거를 안다 잡풀들 사이에서 썩어가는 뼈대들,
접혀진 타이어엔 끊어진 길들의 지문이 찍혀 있고 체인마다 틈입해 화석처럼 굳
은 피로들, 한때는 자전거였던 그 자전거
한 사내를 안다 새벽, 비좁고 자주 꺾인 골목을 돌아 돌아서 우유 한 병 조용히
놓고 가던 반백의 왜소한 사내, 수금할 때면, 고맙구먼유, 열 번도 더하던 사내,
유난히 부끄럼 많던 그 사내, 무섭게 질주하는 도시, 어느 초겨울 미명의 새벽
차도를 끝내 다 건너지 못한 그 사내
그 노래를 안다 빙판 언덕배기 나자빠진 자전거, 깨진 병 쪼가리들 만지작거리
며 오랫동안 앉아 있던 그 노래, 이 강산 낙화유수 흐르고 흘러
낙엽 한 잎 강물에 떨어져 멀리도 떠내려 왔는데, 가끔씩 새벽 속에서 흥얼흥얼
노랫가락 들리고 창을 열면 낡은 짐자전거 한 대 저만치 가는, 참 오래된 그 노래
를 나는 지금도 안다
[감상]
오래전에 가수 남인수가 구성지게 불렀던 노래 <낙화유수>가 있습니다. <이강산 낙화유수 흐르는 봄에/ 새파란 젊은 꿈을 엮은 맹서야/ 세월은 흘러가고 청춘도 가고/ 한 많은 인생살이 꿈같이 갔네…>, 가사의 상념처럼 가수는 폐결핵으로 죽고, 이 시의 자전거도 철책에 버려져 있습니다. 가수가 죽고 노래가 남듯, 주인 없는 짐자전거가 남아 <끊어진 길> <굳은 피로>의 회상에 젖습니다. <사내>를 통한 자전거에 얽힌 잔잔한 서사가 아련한 시의 온기로 다가오는 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