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 이재훈/ 《문학동네》(근간)
바람의 배
바람이 분다 나는 거리를 걷다가 모든 걸 먹어치우는 거대
한 바람의 입을 본다 비닐봉지가 날리고 미용실 앞에 세워둔
네온간판이 넘어진다 육교를 오르는 연인이 꼭 껴안는다 그
들의 속삭임도 회오리가 채간다 자동차의 전조등이 왔던 길
을 다시 헤집는다 가로등이 퍽 꺼진다 담배연기가 순식간에
바람이 된다 모든 발자국들이 흔들리는 콘크리트 건물 속으
로 들어간다 나는 거리를 걷다가 길을 잃고 바람의 뱃속으로
빨려들어간다
바람이 분다 아무도 없다 이 조용한 거리마저 바람의 입속
으로 들어간다 바람의 배가 잔뜩 부풀어 있다 바람이 터질
자리를 찾고 있다 지구가 다른 혹성을 향해 맹렬히 돌진한다
[감상]
이 시를 읽다보니 산문시란 이런 것이구나란 생각이 듭니다. 짧고 간결한 흐름, 그 안에서의 인상적인 포착, 더 나아가 <바람>에게로 집중되는 강력한 추동력이 느껴집니다. 화자의 시선은 바람에 의해 영향 받는 대상들로부터 미끄러지듯 이동하다가, 영화의 점프컷처럼 시선을 우주로 확장시킵니다. 이 점이 참 탁월한 부분이기도 하고요. <바람>과 <배>라는 공통의 이미지를 하나로 그러모아, 속도감 있게 풀어낸 직관이 견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