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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목회 - 천서봉

2005.12.01 15:06

윤성택 조회 수:2013 추천:227

<바람의 목회> / 천서봉 / 2005년 『작가세계』겨울호, 신인상 당선작 中


  바람의 목회

  붉은 창문들 저무네.  거리엔 부옇게 물길이 번지고 벗겨진 대지의 표면이
비늘처럼 흘러가네. 햇살의 따가운 못질 뒤에도 나무들은 자꾸만 제 잎 쥐고
휘청거리네.

  버려진 오르간처럼 켜켜이 쌓인 공사장 파이프들이 저녁을 연주하네. 노을
따위를 발음하면 삶은 늘 뿌리부터 뒤척인다고, 저기 어깨 둥글게 웅크려 철
야기도를 준비하는 가로수.

  공중을 만지는 평화로운 연기를 보네.  바람은 오후 6시를 읽는 기술, 혹은
복음.  흔들려야지. 흔들려야지.  깃대처럼 골목에 나를 꽂아두네. 떨어져 빈
나뭇잎 자리까지, 다만 모든 것이 바람의 영역이네.

  늦은 상점의 문이 스르륵 밀렸다가 절로 닫히네. 누구일까. 누구일까. 어둠
의 긴 목이 자꾸 기울고 사람들은 정물처럼 늙어가네. 모두가 바람의 존재를
믿었지만 아무도 그의 뼈마디를 보지 못하네. 푸르르,

  저마다의 십자로를 건너는 시간,  허파꽈리처럼 웅크려  핀 생의 바람꽃들,
지천이네. 자라, 자라, 잠들지 않는 한밤의 환한 집회를 보네.


▶ 천서봉
1971년 서울 출생
2005년 《작가세계》로 등단


  아픈 쪽에 오래 풀어 놓은 짐

  저물 무렵 고즈넉한 풍경에도 믿음이 있다. 그것은 서서히 경배하듯 저녁을 받아들이는 하나의 의식과도 같다. 이 시의 소재들은 집회에 동참하며 실재를 중심으로 형성된 개별적이고 집단적인 믿음을 갖는다. 그 믿음의 정서는 서정이라는 시적 상징으로 충만하다. 다시 말해 서정의 개신교에서는 <바람>의 목사가 풍경을 맡아 설교하며 신앙을 지도하는 <저녁>이 있는 것이다.
  이 시는 기독교의 집회 형식을 빌릴 뿐, 그 교리를 언급하지 않는다. 다만 사물과 결합하며 은유해 내는 낯선 <집회>가 목격될 뿐이다. 그 면면에는 <햇살의 따가운 못질>로 예수의 손바닥처럼 <제 잎을 쥐고 휘청거리>는 나무가 있고, 파이프오르간과 같은 <공사장 파이프들>이 연주하는 엄숙한 <저녁>이 있다. 또한 가로등 사이 밤새 비칠 가로수들의 <철야기도> 준비와, 저녁의 <평화로운 연기>인 <복음>이 있다. 그리고 사거리에서는 신호를 기다리는 붉은 미등의 자동차들이 <잠들지 않는 집회>를 갖는다. 이렇듯 이 시는 기독교적 형식을 동력으로 끊임없는 비유를 모색해낸다.
  그러나 이면에는 그 어떤 신앙의 것들이 있다.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이며 항상 존재의 막막함 속에서 살고 있기에 꿈꿀 수 있는 그 어떤 것. 이러한 내면의 충동이 확장되면서 궁극적으로 실재가 되어가는 구원과 같은 그 어떤 것. <다만 모든 것이 바람의 영역>인 그 너머의.
  천서봉이라는 이름을 신춘문예 최종심에서 보기 시작한 때는 2002년부터였다. 그러나 신춘문예는 매해 갖가지 이유로 그의 문학에 대한 믿음을 유보한다. <비유적 표현들이 새롭게 읽히기보다는 장식적으로 읽힌다>, <심상 사이 모호한 주름이 장식적이며 화려한 수사의 찌끼가 아닐까>라며 그의 진정성을 의심한 듯하다. 그래서 지난 몇 년간 그의 비유는 탕자처럼 습작기를 떠돌았을 것이다. 몇 번씩 좌절했다가 다시 일어서는 그를 놔두고, 세상은 덧없이 해를 바꿔갔다.
  <나를 누르고 있는 이 '중력'의 힘을 버티지 못해 나의 허리는 늘 아팠으며 나의 꿈은 종종 날고 싶은 덧없는 욕망에 시달렸다 아픔은 늘 낮보다 밤이 더 심했으며 내 시 쓰기는 그렇게 아픈 쪽에 오래 짐을 풀었다 - 천서봉의 글 中 (www.hello1000.pe.kr)>
  그런 그가 돌아와, 가장 아프고 힘들었던 비유의 반석에 다시 시를 세웠다. 그래서인지 그의 비유에서는 경건하고 비장함이 서려 있다. 이 시의 종교적 은유와 문학적 주문들이 새롭게 읽히는 까닭이기도 하다. 한편으로는 시가 한 번도 그를 탕자처럼 여기지 않았을 거란 생각도 든다. 한시도 잊지 않고 그를 기다려준 늙은 아비 같은 것이 그가 열망했던 진정성이었을 것이므로.
  믿음은 희망의 가장 밝은 부분이다. 물론 각박한 이 시대를 시가 휴거처럼 일시에 구원해 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가《작가세계》라는 세례를 받고 이 어두운 시대, 시의 촛불을 들고 나아가는 이가 되길 기대해 본다. - 《현대시학》2005년 12월호 <내가 읽은 올해의 등단시>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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