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 신기섭/ 2005년《한국일보》신춘문예로 등단
추억
봄날의 마당, 할머니의 화분 속 꽃을 본다.
꽃은, 산소호흡기 거두고 헐떡이던
할머니와 닮았다 마른 강바닥의 물고기처럼
파닥파닥 헐떡이는 몸의 소리
점점 크게 들려오더니 활짝
입이 벌어지더니 목숨을 터뜨린 꽃,
향기를 내지른다 할머니의 입속같이
하얀 꽃, 숨 쉬지 않고 향기만으로 살아 있다.
내 콧속으로 밀려오는 향기, 귀신처럼
몸속으로 들어온다 추억이란 이런 것.
내 몸속을 떠도는 향기, 피가 돌고
뼈와 살이 붙는 향기, 할머니의 몸이
내 몸속에서 천천히 숨쉰다.
빨랫줄 잡고 변소에 갈 때처럼
절뚝절뚝 할머니의 몸이 움직인다.
내 가슴속을 밟으며 환하게 웃는다.
지금은 따뜻한 봄날이므로
아프지 않다고, 다 나았다고,
힘을 쓰다 그만 할머니는 또
똥을 싼다 지금 내 가슴 가득
흘러넘치더니 구석구석
번지더니 몸 바깥으로 터져 나오는
추억, 향기로운 나무껍질처럼
내 몸을 감싸고. 따뜻하다.
[감상]
추억을 떠올린다는 것은 현재에서 되돌아보는 최면과도 같은 그리운 힘입니다. 그리고 추억은 점점 소멸되어가는 과거를 아름답게 소생시킵니다. 시인은 할머니의 죽음을 되돌아보며, 그 모든 것을 가슴 속에 환하게 품어냅니다. 그러나 오늘 하루가 어제와 다른 슬픔 같은 것, 그 안에 개입된 생각이, 망연자실한 떨림처럼 긴 한 숨으로 묻어납니다. 신기섭 시인의 부음을 듣고 한참동안 안타까움을 금할 길 없었습니다. 스물여섯까지 살아온 그가 남긴 시의 무늬들이 너무도 뜨겁게 삶에 찍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추억이란 이런 것/ 내 몸속을 떠도는 향기>처럼 아래의 글이 내내 아프게 다가오는군요. 교통사고 전날, 신기섭 시인이 마지막으로 홈페이지에 남긴 글을 애도의 심경으로 옮겨 놓습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밥을 지어 먹고 앉았다가 창문을 열고 내다보니
옥상에 흰 눈이 쌓이고 있다. 눈이 많이 온다는데
새벽에 출장, 영천行- 무언지 모를 불길한 기분...
옥상에 쌓이는 눈은 나 아니면 아무도 밟아줄 사
람이 없는데. 그런 장소를 가지고 있는 내 생활이
좋다. 다녀와서 발자국 몇개 꼭 남기리라. 옥상에
눈이 많이 쌓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