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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의 부처님 - 김애리나

2005.12.13 15:51

윤성택 조회 수:1598 추천:206

<봄날의 부처님>/ 김애리나/ 《진주신문》2005년 가을문예 당선작


        봄날의 부처님

        쉿, 부처님 주무시는 중이세요
        햇살이 부처님의 이마에 키스 하고파
        법당 안을 기웃대는 봄날이었지요

        졸립지요 부처님? 그래도 봄인데
        나들이는 못 갈망정 마당 가득 피어난 꽃나무좀 보세요
        산사나무 조팝나무 매자나무 꽃들이 치마를 올리고
        벌써 바람을 올라탈 준비를 하는 걸요
        꽃가루 가득 실은 바람과 공중에서 한 바탕 구르다
        주워 입지 못하고, 흘린 치마들이 노랗게 땅을 수놓는 걸요
        화나셨어요 부처님? 왜 오롯이 눈은 내리깔고 침묵하셔요
        이 봄에 관계하지 못한 生이란 울기만 하는걸요
        보세요, 대웅전 계단 옆 고개 숙인 한 그루의 불두화를
        향기 많은 꽃에 벌과 나비가 꼬여 열매를 맺는 모습은
        수도승들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하여 성불코자 심었다는 불두화가
        관계를 나누다 쓰러진 것들을 보며, 눈물을 찍어내고 있어요

        천년이 넘게 한 세상 굽어만 보시는 부처님
        오늘처럼 법당에 둘이만 있는 날에는
        당신 한번 넘어뜨리고 싶은 마음 아시는지,
        헛. 헛 기침하시네요 토라져 눈감으시네요
        긴 손 뻗어 몇 날 며칠 불두화의 눈 감겨 주시니
        아, 그제야 봄 저무네요 절름발로 지나가네요


[감상
]

종교가 문학에 의해 새롭게 인식될 때 경외나 엄숙이 굴절되면서 그 의미가 배가 되기도 합니다. 시인의 상상력은 이처럼 천진하면서도 인간적입니다. 그 근저에 종교의 깨달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시는 따뜻한 봄날 절간의 부처에게 향하는 농밀한 형상화가 재미있습니다. 기존의 상식을 일갈하고, 능청스럽게 부처를 꼬드기는 서정은 외설스럽기보다는 건강한 춘정에 가깝습니다. '꽃들이 치마를 올리고/ 벌써 바람을 올라탈 준비', 이 발견 하나만으로도 붕붕 스태미나 같은 봄날을 지나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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