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주유소》 / 권정일/ 《현대시》 시인선
공터의 행복
나는 보드라운 피부의 황토, 풀풀 날아다니길 좋아했죠 호랑나비, 밀잠자리, 썩은 쥐 뱃속에
집을 마련한 파리, 두루말이 휴지, 도둑고양이들과 친했죠 가끔 나팔꽃과 넝쿨손에게 공짜로
세를 내주고 놀고 먹는 땅백수였죠 어느날 볼륨을 높이고 싶은 FM과 1시와 2시 사이를 왔다
갔다 하는 늙지 않는 시간이 눌러 앉았어요 저기 태정씨의 아나키스트였던 286컴도 보이네요
웃음이 흘러넘치던 분홍 욕조가 또 왔어요 아! 욕조 안으로 청춘 둘이 들어가네요 낯뜨거워요
나는 공공의 천사, 마음을 절거나 부서진 사람들은 다 내게로 오세요 일찍 배운 세상은 불길
할까요? 완벽한 육체였던 십자가들에게 날개를 달아주죠 그러면 나와 비슷하게 생긴 사람들
이 와서 날개 달린 십자가를 가져가곤 하죠 금세 지붕 없는 아름다운 거실만 있는 넓은 집이
생겼어요 언제나 연탄처럼 뜨겁게 붙어 있는 친구들이 불러모으는 저녁, 식은 달의 잡담, 끼리
끼리의 사랑이 흘러넘쳐
행복해요
[감상]
시를 읽고 나니 정말로 공터처럼 행복해집니다. 정적뿐인 공터의 버려진 것들도 왕년에 한시절이 있듯 각자 분주하고 바쁩니다. 마치 시장통 플라스틱 깔개에 앉아 잡담을 파는 아주머니들처럼 수다스럽다고 할까요. 그러나 화자인 <공터>의 그 넉넉하고 여유로운 품성에 누구든 매료될 것 같습니다. <십자가>가 구원을 의미하듯 버려진 것들을 수거해가는 고물상도 등장인물이군요. <일찍 배운 세상은 불길>하다는 직관이 인상적입니다. 리듬감 있는 다른 시들도 읽는 재미가 쏠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