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떫은 생> / 윤석정/ 《현대문학》2006년 2월호
떫은 생
봄이 왔다 나는 설익은 약속처럼 헤어지기 바빴다
꽃이 떨어진 자리에서 새롭게 태어나는 여린 감들
구부러진 길 끝에 앉아 나는 태양의 부피를 재곤 했다
내 심장에 수혈하는 햇살바늘
여름부터 검은 바늘자국이 따끔거렸다
아프지 않을 때만 감들이 보였는데
감들의 낯빛은 점점 태양을 닮아갔다
새부리에 쪼인 감들은 유독 붉디붉었다
감들은 속곳을 전부 드러낸 채 떨어지거나
가까스로 공중에 매달려 있었다
새들이 빼먹지 못한 감씨가 얼핏 보이곤 했다
몸을 눈부시게 열고도 길에서 떠날 수 없는
반쪽짜리 생, 그 감은 한 번 꽃피자 입을 쫙 벌리고
뿌리에 달라붙은 눅눅한 어둠까지 감아올렸다
어둠은 점점 바깥을 달콤하게 부풀리며
심장에 몰려와 단단하게 여물어갔다
눈이 내리자
쭈글쭈글한 감들이 서둘러 햇볕을 쬐러나왔다
더는 빨아들일 어둠이 없어서 바깥을 컴컴하게 만들기 시작했는데
끝내 어둠에 덮여 어둠 속에 들어간 늙은 감들이
떫디떫은 심장을 남겨놓았다
다시 봄이 왔다 나는 어둠을 빨아들이기 위해
가지 끝으로 옮겨 앉았다
[감상]
감의 생태적 흐름과 관찰을 우리의 삶과 <환생>과 잇대어 풀어내는 치열함이 돋보이는 시입니다. 사계절로 치닫는 과정은 한 <떫은 생>이 되며, 그 부피의 자람과 새의 날카로운 부리는 어느새 온갖 신산을 겪는 우리네와 닮아 있습니다. 눈여겨 볼만한 것은 어둠을 다루는 능숙함에 있는데, <어둠은 점점 바깥을 달콤하게 부풀>린다거나 <끝내 어둠에 덮여 어둠 속에 들어간 늙은 감들>과 같은 표현이 그러합니다. 감나무 한그루에는 온전히 개성을 달리한 수많은 개체들이 달려 있고, 그 중 하나인 <나>는 다른 감들과 섞여 떫은 생을 살다가 사라질 것입니다. <어둠>과 <봄>의 상징이 그러하듯, 지금 우리는 누군가가 살다간 봄을 다시 살러온 <가지 끝> 또 다른 생이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