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미생활> / 김원경/ 《시에》 2006년 봄호 (창간호)
취미생활
주전으로 가는 길목,
몇 차례에 걸쳐 도로 확장 공사가 있었다
중심을 잃어버린 바닥이 업고 있던 절벽을 떨어뜨리면서
어린 흑송 한 뿌리를 밀어냈다
아직 살아보지 못한 생을 더 파먹으려는 흑송
신생아처럼 신문지에 싸이는데, 좀처럼 놓아주지 않는 바람 때문에
집으로 돌아온 아버지의 바짓단에는 도깨비풀이 붙어 있었다
분재는 아버지의 취미생활이 되었고, 그날부터
밤마다 아버지는 내 몸에 철사를 감기 시작했다
영문도 모르는 묘목은
사각형 분 속, 구부정하게 다리를 뻗어보지만
사정을 봐주는 일 따위는 일어나지 않았다
까마득한 곳으로 자신의 한 부분이 묻히는 것을 보고
처음부터 묻힐 곳을 정해두고 묻히는 것은 아니라며
입 속에서 바늘을 뱉어냈다
어떤 수형이 가능할지 이리저리 살펴보다가
긴 잎부터 자르기 시작해!
『알기 쉬운 분재』의 몇 페이지가 쫑알쫑알 수다를 떤다
불필요한 잎을 쳐내는 일은 언제, 어디서나 과감하기도 하지
잎은 순식간에 타들어 갔지만
며칠이 지나자 순순히 붉은 기색을 버리기 시작했다
애당초 고엽제로 머리가 타들어간 건 아버지였으므로
이 지상의 모든 눈동자, 아버지
등지고 돌아서서 다시는 보이지 않는 곳으로
헉헉거리며 숨어든 곳, 막다른 곳에 이르러서도
집집마다 문패에는
아버지의 이름이 걸려 있었다
묘목은 나날이 허공의 길을 추월하면서 자랐고
번지가 없는 곳으로 뿌리는 뻗어나갔다
[감상]
울산 북구로 넘어가는 주전고개 그 즈음인 것 같습니다. <흑송>에서 아버지의 취미생활로 뻗어가는 상상력에 힘이 있는 시입니다. 특히 <내 몸에 철사를 감기 시작했다>로 과감하게 자신과 동일화 시키는 대목에 이르러서는, 화자에 대한 아버지의 기대감과 이에 곤혹스럽게 반응하는 사춘기 딸의 심경도 떠올려집니다. <흑송>이 자라나듯 언젠가는 아버지의 번지수에서 벗어나 독립해야할 시기가 다가오겠지요. 분재에 대한 세밀한 관찰, 아버지와 화자를 <흑송>에 빗대는 직관이 돋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