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로등> / 한혜영/ 문학동인 《빈터》 5집 (2006) 中
가로등
내가 이사 오기 훨씬 전부터 저기 서성댔을
저 남자를 꼭 빼어 닮은 아저씨를 본 적 있다
바지 구겨질까 전전긍긍
쪼그리는 법도 없이 벌을 서던 그 아저씨
흰 바지에 칼주름 빳빳하게 세워 입고
밤만 되면 은하수처럼 환하게 깨어나서
지루박 장단으로 가뿐하게 산동네를 내려갔던
내려가서는 세월 캄캄해지도록 올라올 줄
몰랐던 그 아저씨 청춘 다 구겨졌어도
바지주름만큼은 시퍼렇게 날 세운 채 돌아와서
서성거리던, 늙고 깡말랐던 전봇대를 본 적이 있다
꼭꼭 닫혀버린 본처 마음
대문이 열리기를 기다리던 그 아저씨
물음표로 무겁게 떨어졌던 고개 아래
불콰하게 익어가던 염치없음을 본 적 있다
저기
저 남자처럼 비까지 추적추적 맞으면서
[감상]
가로등은 춤바람 났던 아저씨의 고개 숙인 참회와 같은 거군요. 빳빳한 <칼주름>이나, 구겨진 <청춘>과 불콰한 <염치없음>의 표현들이 가로등이라는 대상과 어우러져 한 남자의 생을 잔잔하게 조명합니다. 그리하여 저 밖에서 서서 비 맞는 가로등의 왠지 모를 쓸쓸함은, 청춘을 탕진하고 고개 숙인 어쩌면 우리의 모습인 것만 같아 명치끝이 아릿해져옵니다. 우리는 일생의 무엇을 좇아 마음의 안식처였던 <동네>를 내려가 헤매고 있는 것일까요. 회한이 응축된 눈물 같은 비가 흘러내리는 밤, 가로등은 남은 시간 내내 저리 서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