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상통》 / 김신용/ 천년의시작 시인선
아내의 재봉틀
수의를 만들면서도 아내의 재봉틀은
토담 귀퉁이의 조그만 텃밭을 깁는다
죽은 사람이 입는 옷, 수의를 만들면서도
아내의 재봉틀은 푸성귀가 자라고
발갛게 익은 고추들이 널린 햇빛 넓은 마당을 깁는다
아내의 가내공장, 반지하방의 방 한 칸
방 한 가운데, 다른 가구들은 다 밀어내고
그 방의 주인처럼 앉아 있는 아내의 재봉틀,
양철 지붕 위를 뛰어다니는 맨발의 빗소리 같은 경쾌함으로
최소한의 생활을 자급자족할, 지상의 집 한 칸을 꿈꾸고 있다
지금, 토담 안의 마당에서는 하늘의 재봉틀인 구름이
비의 빛나는 바늘로 풀잎을 깁고, 그 속에 깃들어 사는 생명들을
깁고 있을 것이다
모든 생명들을 기운 자국 하나 없이 깁는 고요한 구름의 재봉틀,
그 천의무봉의 손이듯, 아내의 구름인 재봉틀은
지상의 마지막 옷, 수의를 지으면서도
완강한 생활의 가위로 시간의 자투리까지 재단해
가계(家計)의 끈질긴 성질을 깁는다
[감상]
체험이 우러난 시에는 그 안에 진실한 생기가 있습니다. 아내의 <재봉틀>이 자연과 생태로 옮아가는 과정이 시인의 희망과 맞물리면서 노동의 참의미를 깨닫게 합니다. 특히 재봉틀이 <구름>으로 환치되는 부분은 정말 후련한 소나기를 들여다보는 기분입니다. 시인의 약력을 보니 부산에서 태어나 14세 때부터 부랑자로 노숙하며 매혈로 끼니 해결, 더 팔 피가 없으면 걸식 혹은 아리랑치기까지 살아남기 위해 어떠한 일도 했다는 부분이 눈에 띕니다. 문득, 시는 목적의식을 담은 전략적인 관념의 자루인가, 아니면 진실하고 절박한 체험을 증류한 정신의 결정체인가 돌이켜보게 합니다.
아픔이나 고통은 서로가 비교할 수 없는 고유의 섬들이나, 그가 살아온 생애에서 자꾸만 고개를 숙이게 하는 군요..가슴이 울렁거리는 시였습니다. 감상 잘 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