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양 중독자》 / 이은림/ 《문예중앙》시인선 (신간)
지는 저녁*
커튼을 젖힌다 딱딱한 태양이 박혀 있다
창밖을 지나던 물고기와 눈이 마주쳤다
물고기 뒤로 잔뜩 부푼 구름이 따라간다
빨간 리본을 맨 검은 고양이 두 마리도
어슬렁어슬렁 지나간다
나는 길게 하품을 한다
천천히 고개 돌리면,
질주하는 등나무가 있는 방
꽃은 본 적도 없는 듯한데 둥근 씨앗들이
벌써 사방에 흩어져 있다
지칠 줄 모르고
등나무는 신나게 제 몸을 꼬기 시작한다
온 방 헤매며 줄기를 뻗친다
하품을 하면서 등나무의 움직임을 본다
내가 눈 한 번 깜박일 때 저것은 몇 번이나
제 몸을 비틀 수 있는 것일까
출구 없는 방,
단지 작은 창 하나
터무니없이 무거운 커튼 사이
느릿느릿 지나가는 물고기들의 행렬
붉은 달이 차가운 입김을 뿜는다
태양이 드릴처럼 하늘을 뚫는다
바람이 유리창을 물어뜯는다
두 눈 끔뻑이거나 긴 하품을 하며, 나는 그저
묵직해진 커튼을 닫았다가 젖혔다가
*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 제목. 1964년 작.
[감상]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시는 말하는 회화요, 회화는 말 없는 시이다>라고 합니다. 이렇게 회화는 작가가 반영시킨 사물과 세계에 대한 사건이자 행위입니다. 이 시는 해질 무렵 무료한 일상을 초현실적 기법으로 활자화 해나갑니다. 이 안에서는 어떠한 이성과 합리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다만 영감에 의존하면서 시각적으로 표출되는 자유스러운 상상력이 충만할 뿐입니다. <질주하는 등나무>가 그러하고 <태양이 드릴처럼 하늘을 뚫>는 풍경이 그러합니다. 시집 제목처럼 이 시집에는 <태양>에서 파생되는 다양한 모티브가 승화되어 있습니다. 그 뜨거운 태양으로 인해 <사막>과 <뼈>와 <미라>가 될지라도 엄살하지 않고 맞서는 진정성이 돋보인다고 할까요. 깨진 유리조각들이 끝끝내 태양을 제 몸에 새기고 있는 이 시 <지는 저녁>,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을 덧붙여 봅니다.
르네 마그리트의 <지는 저녁>, 1964년 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