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수전증 - 박홍점

2007.01.24 17:37

윤성택 조회 수:1208 추천:156

《차가운 식사》/ 박홍점/ 《서정시학》(2007)


        수전증

        누군가 그를 연주하고 있다
        열 개 손가락이 현악기의 줄처럼 떤다
        벙어리 악기,
        일제히 소리 나지 않는 악기 위로 쏠리는 눈빛들
        입 안 가득 모래를 머금어서 모두들 말이 없다
        차마 소리로 표현하지 못한 그의 이력이 손가락 사이에서 흘러내린다
        집게발을 쳐들고 알을 터는 꽃게 같다
        더운 바람이 불어오는 방향을 알 수 없는데
        온몸의 가지들이 바람을 탄다
        뜨거운 물을 붓던 주전자가 컵의 테두리를 벗어나
        살얼음 같은 유리에 금이 간다
        바람이 바람을 부른다
        내가 만지는 컵이며 재떨이 따위가 흔들린다
        눈빛이 머무는 것마다 덜덜 떠는
        오그라붙는 방안의 사물들,
        사물의 심장들
        그가 돌아간 뒤에도 연주는 남아 어른거린다
        흘러간 그의 연주를 오래 듣는 생살의 밤이다
        

[감상]
손이 떨리는 증상을 수전증이라고 하는데, 이 시는 그 증세를 현악기의 줄처럼 떠는 <연주>로 바라보는 시선이 독특합니다. 더욱이 수전증의 그를 연민으로 이해하고 더 나아가 <사물의 심장>까지 직관하는 대목도 깊이가 더해집니다. 어쩌면 <차마 소리로 표현하지 못한 그의 이력>은 알콜 중독이든 신경쇠약이든 니코틴 중독이든 삶의 벼랑까지 내몰린 안타까운 것이어서 모두들 <입 안 가득 모래를 머금>은 듯 침묵하는지도 모릅니다. 제 몸을 제대로 다스리지 못한 순간이 왔을 때 찾아오는 이 떨림은 그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슬프고 안타까운 연주일 것입니다.

번호 제목 날짜 조회 수 추천 수
971 좀팽이처럼 - 김광규 2007.02.02 1345 172
970 오발탄 - 신정민 [1] 2007.01.30 1345 162
969 동백꽃 화인 - 정재록 2007.01.29 1272 167
968 봄날의 산책 - 박순희 [2] 2007.01.27 1738 150
967 창문을 내는 사내 - 박미란 2007.01.26 1302 163
966 나무길 - 문정영 2007.01.25 1462 163
» 수전증 - 박홍점 [1] 2007.01.24 1208 156
964 무의지의 수련, 부풀었다 - 김이듬 2007.01.19 1193 143
963 수도승 - 홍일표 2007.01.16 1303 151
962 저녁에 - 신용목 2007.01.12 1522 170
961 잉어 - 이승주 2007.01.09 1271 185
960 2007신춘문예 당선작 모음 [3] 2007.01.04 2058 160
959 살얼음 - 조영석 2006.12.26 1380 171
958 대숲 - 김영석 2006.12.23 1262 163
957 아기의 햇살 - 변삼학 2006.12.21 1555 211
956 이 밤이 새도록 박쥐 - 이윤설 2006.12.20 1780 233
955 벌들의 진동 - 이선형 2006.12.18 1409 216
954 나무 한 권의 낭독 - 고영민 2006.12.14 1456 217
953 회전문 - 이수익 2006.12.11 1483 228
952 콜라병 기념비 - 장이지 [1] 2006.12.07 1373 2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