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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의 뜨개질 - 길상호

2007.03.07 18:04

윤성택 조회 수:1463 추천:151

《모르는 척》/ 길상호/ 《시작》 시인선 (2007)


        비의 뜨개질

        너는 비를 가지고 뜨개질을 한다,
        중간 중간 바람을 날실로 넣어 짠
        비의 목도리가, 밤이 지나면
        저 거리에 길게 펼쳐질 것이다,
        엉킨 구름을 풀어 만들어내는
        비의 가닥들은 너무나 차가워서
        목도리를 두를 수 있는 사람
        그리 흔하지 않다,
        거리 귀퉁이에서 잠들었던 여자가
        새벽녘 딱딱하게 굳은 몸에
        그 목도리를 두르고 떠났다던가,
        버려진 개들이 물어뜯어
        올이 터진 목도리를 보았다던가,
        가끔 소문이 들려오지만
        확실한 건 없다,
        비의 뜨개질이 시작되는 너의 손은
        무척이나 따뜻하다는 것 말고,
        빗줄기가 뜨거운 네 눈물이었다는 것 말고는

        
[감상]

익숙하던 것이 낯설어질 때 시는 진정 시다워집니다. 이 시는 <비>에 대한 익숙한 시선을 무효화하고 낯설게 그리고 새롭게 존재를 재탄생시킵니다. 빗방울 하나 하나가 한 땀 한 땀 정성어린 뜨개질이 되는 순간, 번들거리는 빗물의 흐름은 목도리로 펼쳐집니다. <바람을 날실로 넣어>짜거나 <엉킨 구름>을 바라보는 시선은 그래서 시인만의 발견인 것입니다. 손의 온기를 생각하다보니, 그녀와 영영 헤어지고 비를 맞으며 걸어온 사내가 떠올라 마음이 먹먹해지는군요.
부레가 눌려 터지는 것을 막기 위해 심해의 물고기는 제 몸에서 물의 비중보다 낮은 기름을 만들어냅니다. 시인은 시작의 지향점을 자서에 이와 같이 밝힙니다.
“심해로 들어간 물고기는/ 가혹한 수압을 견디기 위해/ 부레 속에 기름을 채운다,/ 물고기의 부레를 꺼내 불붙이면/ 활활 세상은 밝을 것이다,/ 나의 시는 언제/ 심해에 다다를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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