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안녕 - 박상순

2007.06.20 18:12

윤성택 조회 수:1785 추천:139

<안녕> / 박상순 (1991년 『작가세계』로 등단) / 《현대시학》 2007년 6월호


        안녕

        골목을 빠져나오고 있었는데
        계단을 내려가고 있었다
        20년 전에 여기서 죽었다는 여자가
        내 웃옷을 들고 내 손을 잡고
        함께 계단을 내려가고 있었다
        나 역시 아무렇지도 않게
        20년 전에 내 유리관 속에 누워있던
        어떤 젊은 여자의 생김새를 말해주고 있었다
        좁고 가파른 계단 때문에 그녀의 걸음걸이는 늦고
        갑자기 더운 여름밤이 되어버렸는지
        목덜미는 이미 축축하게 젖어버렸다
        내 손을 잡고 있는 그녀는 차가웠고
        이상한 나라의 언어로 내게 말했지만
        나는 다 이해할 수 있었다

        계단을 내려가고 있었는데
        골목을 빠져나오고 있었다
        20년 전에 여기서 살았다는 남자가
        내가 죽었다는 소식을 전하며
        이미 죽은 그녀가 저 앞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다고 말한다
        나 역시 아무렇지도 않게
        이미 죽은 나는 여자였을 지도 모른다고
        나도 잘 모른다고 말해주고 있었다
        골목은 조금 어두웠지만 걸음을 재촉할 수 있었고
        아직 겨울바람이 남아있어서 어깨를 잠깐 움츠렸지만
        옷깃을 다시 여미며 나는
        사내의 뒤를 묵묵히 따라가고 있었다

        그렇게 골목을 빠져나오고 있었는데
        계단을 내려가고 있었다
        20년 전에 여기서 죽었다는 여자가
        내 웃옷을 들고 내 손을 잡고
        함께 계단을 내려가고 있었다
        나 역시 아무렇지도 않게        
        20년 전에 내 유리관 속에 누워있던
        어떤 젊은 여자의 생김새를 말해주고 있었다
        좁고 가파른 계단 때문에 그녀의 걸음걸이는 늦고
        갑자기 더운 여름밤이 되어버렸는지
        목덜미는 이미 축축하게 젖어버렸다
        내 손을 잡고 있는 그녀는 차가웠고
        이상한 나라의 언어로 내게 말했지만
        나는 다 이해할 수 있었다
        “안녕”


[감상]
누가 살아 있고 죽은 것일까, 이 시를 읽다보면 삶과 죽음에 대한 묘한 아이러니를 경험하게 됩니다. 어쩌면 죽음의 경계는 상식에 갇힌 판단일 뿐이며, 진정한 진실은 죽은자와 산자의 시선으로 본 세상의 역사일지도 모릅니다. 시인의 직관은 이러한 흐름에서 <나는 다 이해할 수 있었다>의 반복적인 응시, <∼있었다> 시제로 삶과 죽음의 시공간을 담담하게 서술해냅니다. 1연과 3연이 거의 똑같음에도 불구하고 2연에 의해 3연이 새로운 의미로 해석되는 점도 이 시의 묘미가 돋보이는 부분입니다.  
번호 제목 날짜 조회 수 추천 수
» 안녕 - 박상순 [4] 2007.06.20 1785 139
150 벽 - 유문호 [1] 2006.04.25 1786 219
149 못은 밤에 조금씩 깊어진다 - 김경주 [1] 2006.08.17 1791 196
148 겨울 모스크바 편지 - 김성대 [1] 2011.02.11 1791 128
147 아직은 꽃 피울 때 - 하정임 2004.08.19 1792 197
146 사랑에 대한 짤막한 질문 - 최금진 2001.12.03 1799 207
145 제기동 블루스·1 - 강연호 [2] 2001.04.10 1802 283
144 첫사랑 - 진은영 [2] 2001.09.11 1803 190
143 민들레 - 이윤학 2001.06.13 1806 285
142 선풍기 - 조정 [1] 2005.01.25 1807 178
141 오래전에 잊은 이의 눈썹 - 허수경 [2] 2011.03.15 1818 146
140 뒤란의 봄 - 박후기 [1] 2006.04.01 1822 233
139 오늘 당신을 만난 데자뷰 - 박선경 2006.01.11 1824 255
138 남해 유자를 주무르면 - 김영남 2011.04.06 1826 160
137 아침의 시작 - 강 정 [1] 2007.04.17 1827 164
136 식당에 딸린 방 한 칸 - 김중식 [1] 2001.05.02 1828 278
135 저무는 풍경 - 박이화 [1] 2006.05.02 1829 208
134 별이 빛나는 밤에 - 장만호 2008.11.26 1829 128
133 당신은 - 김언 [1] 2008.05.26 1837 162
132 삼십대 - 심보선 [1] 2008.05.27 1842 17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