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 박상순 (1991년 『작가세계』로 등단) / 《현대시학》 2007년 6월호
안녕
골목을 빠져나오고 있었는데
계단을 내려가고 있었다
20년 전에 여기서 죽었다는 여자가
내 웃옷을 들고 내 손을 잡고
함께 계단을 내려가고 있었다
나 역시 아무렇지도 않게
20년 전에 내 유리관 속에 누워있던
어떤 젊은 여자의 생김새를 말해주고 있었다
좁고 가파른 계단 때문에 그녀의 걸음걸이는 늦고
갑자기 더운 여름밤이 되어버렸는지
목덜미는 이미 축축하게 젖어버렸다
내 손을 잡고 있는 그녀는 차가웠고
이상한 나라의 언어로 내게 말했지만
나는 다 이해할 수 있었다
계단을 내려가고 있었는데
골목을 빠져나오고 있었다
20년 전에 여기서 살았다는 남자가
내가 죽었다는 소식을 전하며
이미 죽은 그녀가 저 앞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다고 말한다
나 역시 아무렇지도 않게
이미 죽은 나는 여자였을 지도 모른다고
나도 잘 모른다고 말해주고 있었다
골목은 조금 어두웠지만 걸음을 재촉할 수 있었고
아직 겨울바람이 남아있어서 어깨를 잠깐 움츠렸지만
옷깃을 다시 여미며 나는
사내의 뒤를 묵묵히 따라가고 있었다
그렇게 골목을 빠져나오고 있었는데
계단을 내려가고 있었다
20년 전에 여기서 죽었다는 여자가
내 웃옷을 들고 내 손을 잡고
함께 계단을 내려가고 있었다
나 역시 아무렇지도 않게
20년 전에 내 유리관 속에 누워있던
어떤 젊은 여자의 생김새를 말해주고 있었다
좁고 가파른 계단 때문에 그녀의 걸음걸이는 늦고
갑자기 더운 여름밤이 되어버렸는지
목덜미는 이미 축축하게 젖어버렸다
내 손을 잡고 있는 그녀는 차가웠고
이상한 나라의 언어로 내게 말했지만
나는 다 이해할 수 있었다
“안녕”
[감상]
누가 살아 있고 죽은 것일까, 이 시를 읽다보면 삶과 죽음에 대한 묘한 아이러니를 경험하게 됩니다. 어쩌면 죽음의 경계는 상식에 갇힌 판단일 뿐이며, 진정한 진실은 죽은자와 산자의 시선으로 본 세상의 역사일지도 모릅니다. 시인의 직관은 이러한 흐름에서 <나는 다 이해할 수 있었다>의 반복적인 응시, <∼있었다> 시제로 삶과 죽음의 시공간을 담담하게 서술해냅니다. 1연과 3연이 거의 똑같음에도 불구하고 2연에 의해 3연이 새로운 의미로 해석되는 점도 이 시의 묘미가 돋보이는 부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