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콩에서 콩나물까지의 거리』 / 정영선 (1995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 《랜덤하우스 시인선》
타전
한 남자가 겨울 새벽을 돌진하여
담벼락으로 공을 냅다 찬다
공은 치솟다가
공은 담벼락을 울리고
빈털터리 생으로 돌아온다
알알한 통증으로 되돌아온다
걸친 오렌지색 조끼에서 십자로 형광이 번득인다, 그는 미화원?
마스크를 쓰고
교회의 담과
철도의 담이 나란한 골목을 가는 나와
그는 같은 대인기피자?
안개 옷을 걸친 외등이 안개 품안으로 우리를 함께 보듬는다
아직 청소되지 않은 기억을 쓸고 있는가
봄 오도록 말리고 선 고개 숙인 갈대 같은
패배의 기억을 내모는지 모른다
골목을 뻥뻥 울리는 그는
누군가에게 타전을 보내고 있는지 모른다
자신이 침몰하고 있다는 조난 신호
끊임없이 차올려도
처음이듯 서 있는 생이 두렵다
[감상]
타전이란 전보나 무전을 치는 것을 말하는데, 이 시에서는 <담벼락으로 공을 냅다> 차는 행위가 타전인 셈입니다. 공이 벽에 부딪혀 전달되는 그 소리를 누군가에게 전하는 메시지로 형상화한 것이지요. 무언가에 갇혀 있는 듯한 갑갑함을 벗어나고자 하는 <타전>, 그것은 그 새벽 타인에게 보낼 수 있는 유일한 조난 신호인 것입니다. <빈털터리 생으로 돌아온다>라든지, <청소되지 않은 기억을 쓸고 있는가> 표현들이 새롭게 읽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