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네」 / 조 정 (2000년 『한국일보』로 등단) / 2007년 《시와사상》 여름호
지네
건드리면 아악
울 것처럼 몸이 붉은 지네가
기둥 밑으로 기어와 죽어 있었다
뭘 봐 씨팔 년아
독한 말에 걷어차여 발을 떼지 못한 채
염천교 구두 골목 지나 벽제 가는 버스 뒤로 내리 꽂히는
빗줄기를 바라보았다
세브란스 빌딩 앞 가로수 아래
빗물은 컵라면에 차오르고 소주병 매끄런 어깨를 쓰다듬었다
건물 틈틈이 기대어 그들은 비를 긋거나 볕을 피하는데
그는 늘 가로수 아래 있었다
불어서 녹는 신문지 같은
그를 무릎에 안고
길은 어디를 바라보고 있는지 눈 밑이 번들거리기만 했다
먼지처럼 고요해진 그를 개미 떼가 떠메어 갔으나
잠이 들면 그는 미약처럼
내 콧속으로 스며들었다
붉게 취한 그가 목을 물어뜯었다
가임기 지난 월경이 요를 적셨다
[강인한 시인 감상]
* 오늘은 특별히 늘 열정적이신 강인한 선생님의 시읽기로 대신합니다. 달리 다른 감상을 덧붙일 필요없이 제 생각도 마찬가지입니다.
조 정 시인이 발표한 신작시입니다. 힘 있고 선이 굵은 시. 무섭고 끔찍한 거리의 어떤 풍경을 그린 시입니다. 여성 시인으로서 나는 일찍이 조 시인만큼 당차고 과감한 표현을 서슴지 않는 시인을 본 적이 없습니다. 비 내리는 가로수 아래 비 맞은 신문지처럼 불어터진 한 부랑자 사내, 그의 까닭 없는, 세상을 향한 붉은 적의가 무섭게 느껴집니다. 첫 연과 끝 연은 실제의 지네, 중간은 지네를 닮은 사내 이야기입니다. 기승전결의 구성도 치밀합니다. 이 시는 특별히, 지네의 검붉은 색채 이미지가 소름끼치게 전체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기둥 밑에 죽어 있는 몸이 붉은 지네, 붉게 취한 그, 요를 적신 가임기 지난 월경, 읽을수록 맛이 우러나는 빼어난 시입니다.
■ 강인한 시인
1944년 전북 정읍 출생. 1967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제5회 전남문학상 수상
시집 『이상기후』,『불꽃』,『전라도 시인』,『우리나라 날씨』,『칼레의 시민들』,『황홀한 물살』, 시선집 『어린 신에게』, 시비평집 『시를 찾는 그대에게』등
다음카페 ‘푸른 시의 방’ 운영 (http://cafe.daum.net/poem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