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의 백만번째 어금니』 / 신용목 (2000년 『작가세계』로 등단) / 《창비》(2007)
가을비
흙에다 발을 씻는
구름의 저녁
비
거품처럼 은행잎
땅 위에 핀다
지나온 발자국이 모두 문장이더니
여기서 무성한 사연을 지우는가
혹은 완성하는가
바람의 뼈를 받은 새들이 불의 새장에서 날개를 펴는 시간
고요가 빚어내는 어둠은 흉상이다
여기서부터 다리를 버리고
발자국 없이 밤을 건너라
희미한 꿈이 새의 날개를 빌려 사연을 잇고
흙투성이 바닥을 뒹구는 몸의 문장은, 채찍을 펼쳐
그 얼굴 때리는 일
[감상]
가을에 내리는 비는 왠지 끌림이 있습니다. 플라타너스 낙엽 위로 툭툭 내리치는 소리라든가, 배수구에서 가랑가랑 휩쓸리는 은행잎의 흔들림이라든가, 차창에 웅크린 빗방울 속 구름내음라든가… 이 시를 가만히 읽다보면 연과 연을 건너뛰면서 고도로 응축된 여러 풍경을 볼 수 있습니다. 참 절묘한 가을비의 표현인 <거품처럼 은행잎/ 땅 위에 핀다>, 빗물 고인 웅덩이 속 은행잎들 위로 쉴새없이 쏟아져 내리는 비가 한눈에 선합니다. 가을은 추억의 계절, 빗물은 발자국을 지우며 걸어왔던 행적을 지워갑니다. 새들이 바람 속에서 붉게 타들어가는 가을나무에 깃들면 그게 <불의 새장>이 됩니다. 우산 없이 가을비에 흠뻑 맞아본 사람은 알 수 있을까요… 누구에게나 사연은 가을에 더 절실해지는 법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