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드베키아」 / 천외자 (2002년 『시현실』로 등단) / 《열린시학》 2007년 가을호
루드베키아
그는 나오지 않았다
의자에 앉아서 쉼보르스카 시집을 꺼낸다
책을 펴서 얼굴을 가리고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하게 삼십분만 소리죽여 울다가 일어설 것이다
루드베키아가 피어있는 간이역
서로 떨어진 꽃잎이 제각각 바라보는 방향으로
이별은 역사의 빈 공터에서 무성하게 자라고 있다
시들고 있다
누군가 새롭게 만들고 있다
만남을 잃어버린 역사에서 모든 것은 이별의 진행 방향이다
기차가 떠난다
옷에 묻은 먼지를 털고 의자에서 일어선다
출구로 나가는 사람들 속에 내가 없어도 아무도 주의 하지 않는다
의자 위에는 바람이 시든 장미 다발처럼 놓이고
나는 선로 건너편 루드베키아 꽃밭 속으로……
시베리아로, 안데스로, 히말라야로, 실크로드로……
샛노란 꽃잎의 길이 열린다
이 많은 길을 누가 만들었을까
카테리니행 기차는 여덟시에 떠났다네
또 다른 루드베키아 한 송이가 새로 핀다
하나가 아니고 유일한 것도 아니고
이별은 일상이 되고
이제 얼굴을 책으로 가리고 혼자 울지 않아도 된다
[감상]
가을은 왠지 센티멘털하여, 마음을 사치해도 용서가 될 것 같은 계절입니다. 이 시를 읽으니 가을의 정취에 흠뻑 젖는다고 할까요. 폴란드 시인 쉼보르스카의 시를 읽지 않아도 ‘한때 우리는 닥치는 대로 세상을 살아갈 수 있었다’고 고백하고 싶어집니다. 어느 간이역 벤치에서 <시베리아로, 안데스로, 히말라야로, 실크로드로……> 떠올리는 시적 확장이 가슴을 탁 트이게 하는군요. <이별>을 시의 정조로 환치시키는 <이별은 역사의 빈 공터에서 무성하게 자라고 있다/ 시들고 있다> 부분이나 그 역설이 의미하는 깊이도 마음을 붙잡습니다. 카테리나행 여덟시 기차는 이미 소설이나 가요로도 정서화(?)가 되었지요. 이 시가 그런 코드를 반복하는 이유, 나름 감성의 극대화를 위한 방편이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