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멧돼지》 / 채풍묵 (1993년 『월간문학』에 시조, 1999년 『문학사상』으로 등단) / 《시작》시인선(2008)
꽃들에게 묻는다
가늘고 푸른 길을 가만히 더듬어 가면
그 길은 어디로나 줄기를 뻗어
길은 저리도 많은 거구나 알게 되더라
잡을 수 없는 꿈을 좇는 어떤 길은
하늘하늘 흔들리는 계단이파리를 딛고
낮은 하늘 아래 바람꽃으로 피고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어떤 길은
바람 속을 허허롭게 걸어 어느새
주점 앞에 이르면 술패랭이꽃으로 핀다
산책로를 따라 도는 발길에게 문득문득
그가 지나온 길을 묻다가
내가 지나온 길을 묻다가
꽃잔디 무성한 정원에 이르러 생각한다
순환할 수 없는 길을 가는 우리는
어떤 꽃으로 피어날 수 있을까
할 말을 묻은 채 세상을 지나는 길섶에
꽃이 피면, 말 못한 죄들이 꽃으로 피면
무슨 이름의 야생화가 되는 것일까
처음 만나는 꽃들에게 되물어 보며
내내 꽃이름만 하나씩 살펴보다가
꽃처럼 말을 감춘 아침고요 산책길
[감상]
빛깔 곱게 한 행 한 행 그동안 보지 못했던 낮은 곳에서 꽃들의 속삭임이 들립니다. 꽃이 피어난다는 것은 하나의 인생이 시작되는 것일까요. '우리는/ 어떤 꽃으로 피어날 수 있을까', '말 못한 죄들이 꽃으로 피면'에서 볼 수 있듯이 꽃과 우리는 개별적이 아니라, 자연 안에서 연대하고 결속되는 존재임을 실감케 합니다. 하찮게 보이는 꽃일지라도 식물도감 속에서는 어엿하고 귀한 생명체입니다.
"웃어요!"하는 그 목소리가 하도 깜찍해
어쩜, 기계인 저도 꽃들에게 말을 거는데
말 한마디 건네지 못했던 나는 그저
그들을 잡초라 저장하고 돌아서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