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에 이야기하는 것들> / 고영민 (2002년 《문학사상》으로 등단) / 《미네르바》 2008년 여름호
저녁에 이야기하는 것들
이 저녁엔 사랑도 事物이다
나는 비로소 울 준비가 되어 있다 천천히 어둠 속으로 들어가는 늙은 나무를 보았느냐,
서 있는 그대로 온전히 한 그루의 저녁이다
떨어진 눈물을 주을 수 없듯
떨어지는 잎을 주을 수 없어 오백년을 살고도 나무는 기럭아비 걸음으로 다시 걸어와 저녁 뿌리 속에 한 해를 기약한다
오래 산다는 것은 사랑이 길어진다는 걸까 고통이 길어진다는 걸까
잎은 푸르고, 해마다 추억은 붉을 뿐
아주 느리게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는 저 나무의 집 주인은 한 달 새 가는귀가 먹었다
옹이처럼 소리를 알아먹지 못하는 나이테 속에도
한때 우물처럼 맑은 청년이 살았을 터이니,
오늘 밤도 소리를 잊으려 이른 잠을 청하고
자다 말고 일어나 앉아 첨벙, 몇 번이고 제 목소리를 토닥여 재울 것이다
잠깐, 나무 뒤로 누군가의 발이 보였다가 사라진다
나무를 따라와 이 저녁의 깊은 뿌리 속에 반듯이 눕는 것은 분명
또 다른 너이거나 나,
재차 뭔가를 확인하려는 듯 혼자 사는 저 나무의 집 주인은 낮은 토방에 앉아
아직도 시선이 집요하다
날이 조금 더 어두워지자
누군가는 듣고, 누군가는 영영 들을 수 없게
나무속에서 참았던 울음소리가 비어져 나온다
[감상]
매스미디어의 발달로 시각이 예민한 우리에게, 청각은 종종 자연의 정취로 이끌곤 합니다. 가령 산사의 새소리라든가, 비온 후 잎잎이 바람에 서걱이는 소리 같은 거랄까요. 이 시는 시각에서 청각으로 옮겨가며 촉감과 육감 등 다른 감각들을 되살려 냅니다. <옹이처럼 소리를 알아먹지 못하는 나이테 속에도/ 한때 우물처럼 맑은 청년이 살았을 터>에서처럼 오감을 열어놓아야만 감응되는 시구절이 인상적입니다. 해질녘 툇마루에 앉아 들어보는 나무의 울음, 안으로 안으로 중심이 모아져 삼키는 소리. 스피커 둥근 우퍼처럼 둥둥 울리는 그 소리에 귀 기울여보게 되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