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지 한 장 위에서」 / 송재학 (1986년 『세계문학』으로 등단) / 《기억들》(2001)
신문지 한 장 위에서
그가 방이라 가리킨 곳은 신문지 위의 한 뼘
신문지 한 장의 온기란 추위의 다른 이름이다
신문지 한 장의 등걸잠이란 살얼음이다
바람은 징의 동심원을 돌면서
그의 추억 속에 아무도 들어오지 못할 집을 짓는다
신문지 옆에 벗어놓은 신발은
지금 발굴된 고분의 금동 신발처럼 부식이 진행 중이다
신문지 한 장에 자꾸 쏟아지는 모래여,
사람 대신 울어준다는 명사산이여
한때 따뜻한 피돌기를 하던 저녁 불빛들은
이미 박제가 되었기에
가끔 불러보는 이름처럼 마른 피처럼, 눌러 붙었다
천산남로를 기억하는 황사바람 속
기립박수인 양 많은 창을 매달고 들어오는 지하철이
허기 채우는 공복,
그 얼굴에 매달리는 헛웃음에는
쐐기풀 뜯는 느린 노역뿐이다
새 잎 달고 벌써 시드는 플라타너스 가족은
가장 큰 가지를 부러뜨리므로 올해 억지로 꾸려 가리라
무성한 잎을 부끄러워하는 나무들 위로
노을과 싸운 서쪽의 녹슨 하루를 보라
[감상]
신문지 한 장에서 비롯되는 상상력이 밀도 있게 진행됩니다. 가만히 들여다보니 허투루 흘려보낼 문장이 하나도 없군요. 마치 근육질의 비유들 같다고 할까요. ‘바람은 징의 동심원을 돌면서/ 그의 추억 속에 아무도 들어오지 못할 집을 짓는다’라는 표현은 과거의 기억으로 빨려 들어가는 SF영화처럼 생생하게 다가옵니다. 삶은 끝끝내 세상과의 대결이고 그 대결의 구도에는 승자와 패자가 아직 존재하지 않습니다. 다만 ‘노을과 싸운 서쪽의 녹슨 하루’가 있을 뿐입니다. ‘서정이란 격렬함이 팽창하여 폭발하기 직전의 불온함’이라는 시인의 산문 글귀에 밑줄을 긋습니다.
황사바랍, 오타났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