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쁜 소년이 서 있다》 / 허 연 ( 1991년 『현대시세계』로 등단) / 《민음의시 149》(2008)
슬픈 빙하의 시대 2
자리를 털고 일어나던 날 그 병과 헤어질 수 없다는 걸
알았다. 한번 앓았던 병은 집요한 이념처럼 사라지지 않
는다. 병의 한가운데 있을 때 차라리 행복했다. 말 한마
디가 힘겹고, 돌아눕는 것이 힘겨울 때 그때 나는 파란색
이었다.
혼자 술을 먹는 사람들을 이해할 나이가 됐다. 그들의
식도를 타고 내려갈 비굴함과 설움이, 유행가 한 자락이
우주에서도 다 통할 것같이 보인다. 만인의 평등과 만인
의 행복이 베란다 홈통에서 쏟아지는 물소리만큼이나
출처불명이라는 것까지 안다.
내 나이에 이젠 모든 죄가 다 어울린다는 것도 안다. 업
무상 배임, 공금횡령, 변호사법 위반. 뭘 갖다 붙여도 다
어울린다. 때 묻은 나이다. 죄와 어울리는 나이. 나와 내
친구들은 이제 죄와 잘 어울린다.
안된 일이지만 청춘은 갔다.
[감상]
시집을 정독하게 되면 맨 앞 장의 간지에 소감을 적곤 했습니다. 오직 우윳빛이 도는 파이로트 수성펜이어야만 했던, 깨알 같이 작은 글씨들. 1995년 허연 시인의 첫 시집 『불온한 검은 피』는 아무 곳이나 주저앉아 읽어도 시간이 용서되곤 했지요. 10년이 훌쩍 지난 지금 그가 두 번째 시집을 내놓았군요. 여전히 生은 쓸쓸하고 ‘죽은 사람들이 아름다운 그런 영화관’엘 가보고 싶은 날들입니다. 기형도가 미안하지만 희망을 노래한다고 했다면, 허연은 안된 일이지만 청춘은 갔다고 합니다. 허름한 포장마차를 나와 놓쳐버려도 좋을 막차를 기다리는 느낌… 취향이겠지만 이런 분위기를 좋아합니다.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 같은 이 막막함을. 13년 전 『불온한 검은 피』간지에 적었던 글을 옮겨봅니다.
詩가 이토록 극렬하게 가슴에 와 닿는 이유는 그의 언어가 활자 밖 이 공간에서 숨을 쉬기 때문이다. 나는 느낀다. 문장에서 불어오는 낯선 바람의 여정을. 가을의 문턱에서 내가 겪을 수 있는 건 어쩌면 스물다섯 해 알 수 없는 열병이었는지 모른다. 늘 그래왔던 것처럼 난 대체로 살아 있음으로 살고 있다. - 1995. 9. 23 윤성택.
그럼에도 죄의식 조차 상실해 가고 있음에 서글퍼지는 하루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