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신두절』 / 장승진 ( 2002년 『시와시학』으로 등단) / 문학의전당 시인선 67 (2009)
폭주족의 고백
속도를 높인다 달릴수록
얌전한 공기는 근육질의 사내가 된다
처음 그는, 아이의 자전거를
잡아채는 어른의 손길이더니
몸 풀린 복서처럼 매운 주먹 뿌려댄다
모터는 한숨짓지만 달리기를 포기한 적 없다
굉음의 칼날로 그의 굵어진 힘줄을 풀고
가속 페달 위, 마저 남은 공포심도
발끝이 떨리도록 밟아 주리라
얼굴로 향하던 그의 주먹은
빠른 속도 앞에서 속수무책 미끄러진다
피 묻은 듯 검은 레드존에
계기판의 바늘이 가 닿으면
땀구멍마다 숨통이 열린다
주먹도 시원한 바람이 된다
차선을 목숨처럼 지키는 승용차 사이
교차로 몇 개 신호를 위반하며 지난다
나의 일상이 가끔 선홍빛으로도 물들겠지만
그때는 내가 세상의 붉은 눈금을 밝고 가겠지만
속도의 꿈은 환상이다
아버지보다 더 아버지 같은 그에게
나를 이해시키는 험난한 길이다
[감상]
빠른 속도에 이르려면 공기의 저항을 견뎌야 합니다. 이 시는 그러한 공기의 저항을 ‘손길’에서 ‘매운 주먹’으로 형상화해 냅니다. 속도의 끝은 소멸입니다. 이곳에서 저곳을 향하는 속도가 극에 달하면 이곳에서 대상은 사라지고, 저곳에서는 갑작스러운 출현입니다. 그래서 ‘레드존’은 삶과 죽음의 점이지대이며 ‘세상의 붉은 눈금’이란 그 경계이겠지요. 태어남과 죽음. 달리 생각하자면 시간에 구속 받는 생명에게 있어 속도는 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케 하는 것입니다. 빠른 속도에 익숙해지면 공포감도 사라지고 얼굴을 향하던 ‘주먹’은 단지 ‘시원한 바람’일 뿐입니다. 젊은이들이 오토바이에 열광하는 건 이곳에서 사라져 다른 곳으로 가는 욕구, 그것을 충족하기 위한 열망의 수단(기계)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 시대의 ‘아버지’는 현실적입니다. 아버지는 속도란 관성이며 그것은 단지 욕망일 뿐이라는 것, 아니 어쩌면 그러한 속도의 끝에 부재가 있음을 간파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위험을 알고도 미지의 세계를 향한 끝간데 없는 열망을 ‘현실’에게 이해시키기란 쉽지 않은 일입니다. 여행은 귀향을 꿈꾸지만 이미 떠나온 날들이 지금 속도 위에 있습니다. 시인의 고백이 그러하듯, ‘푸른 바다의 꿈을 실현하는’ 그런 날들 말입니다.
교차로 몇 개 신호를 위반하며 지난다
나의 일상이 가끔 선홍빛으로도 물들겠지만
그때는 내가 세상의 붉은 눈금을 밟고 가겠지만...
개인적으루다가 이 구절들이 맘에 드네요.
드디어 동인들 하나, 둘 책을 내는군요.
詩川의 오랜 팬으로 함께 기뻐해봅니다.
제자들에게 자랑스러운 선생님
또한 빛나는 시인 되시기를 빌어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