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은 그리운 쪽으로 눕는다》 / 양현근 (2001년 『시선』으로 등단) / 시선시인선 052
그리운 상처
낮은 곳으로 더 낮은 곳으로
제 무게를 덜어낸 나무들
떠나간 애인의 단발머리를 추억하듯
여남은 이파리를 말없이 흔들어 대고 있습니다
창틀에는 닦여 나가지 않은 오래된 먼지들이
여기저기 둥글게 달라붙어 있고,
감나무에는 홍시 몇 개가
얼굴 붉어지도록 지상을 움켜쥐고 있습니다
다 아물지 못한 것들만 자국이 되는 시간
말라버린 꽃대 근처를 기웃거리며
밑줄도 긋지 않고 저린 안팎을 혼자 읽어가다가
어느 행간에 굵게 긁혀진 상처를 읽습니다
하나, 둘 발목이 돋는 시간
상처도 등을 맞대면 환해지나 봅니다
벌써 서산(西山)은 캄캄해지고,
오늘 또 누군가 나를 떠메고 저물어간다고
써야 하는데
고단한 불빛들은 벌써부터 깜박거리고
하나 둘 별이 돋고
[감상]
해질녘 바라보는 애잔한 풍경이 있습니다. 나무의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져 기억에 길이 생기고, 낮은 그루터기에도 발목처럼 그림자가 돋습니다. 하염없이 저녁해에 마음을 맡기다보면 한때 상처였던 것들이 웅얼웅얼 말을 걸어옵니다. 생각에 잠긴다는 것은 이처럼 그리운 것을 호명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비록 상처일지라도 말입니다. 창문의 먼지처럼 상처도 그렇게 시간에 기댄 채 누군가에게서 나를 지워가고 있습니다. 별빛, 그 별빛은 모두 추억의 빛깔로 당신의 저녁으로 향해 갑니다. 쓸쓸한 톤의 시가 나에게도 다녀갑니다.
시산맥시회 봄나들이 때 뵙고,
운좋게 시집 한 권 얻어 저도 가지고 있습니다.
아직 들춰보지 못했는데
이렇게 좋은 시가 있었단 말이죠?
여럿이 같이 읽으면 좋을 것 같아서
급하게 저도 한 편 골라봅니다.
길을 건너는 동안 / 양형근
혼자 길을 건너는 중이었다
풀섶에 눕자
어린 나무들이 새순을 흔들었다
기슭에는 언제 닿나요
몇 개의 정류장을 지나는 동안
다리는 무거워지고 길은 자꾸 눈을 감았다
차들은 습관처럼 글썽글썽 전조등을 켜고
허리를 감싼 연인이 시간을 스치며 걸어갔다
마을을 등지고 적당히 늘어 선 논둑길
내 목소리는 들리지 않고
개구리의 휘파람 소리가 길을 덮고 있었다
그 울음을 깔고 앉아 혼자 술을 퍼마셨다
그 기슭에 어떻게 가야 하는지
젖은 목소리로 물었지만
봄꽃들은 골목을 분주하게 떠메고 다니고
대답 없는 질문들만
햇살 속을 분주하게 떠돌아 다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