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차의 눈을 달랜다》 / 김경주 (2003년 『서울신문』로 등단) / 《민음의 시》160, 제28회 <김수영문학상> 수상 시집
연두의 시제
마지막으로 그 방의 형광등 수명을 기록한다 아침에 늦게 일어난다는 건 손톱이 자라고 있다는 느낌과 동일한 거 저녁에 잠들 곳을 찾는다는 건 머리카락과 구름은 같은 성분이라는 거 처음 눈물이라는 것을 가졌을 때는 시제를 이해한다는 느낌 내가 지금껏 이해한 시제는 오한에 걸려 누워 있을 때마다 머리맡에 놓인 숲, 한 사람이 죽으면 태어날 것 같던 구름
사람을 만나면 입술만을 기억하고 구름 색깔의 벌레를 모으던 소녀가 몰래 보여준 납작한 가슴과 가장 마지막에 보여주던 일기장 속의 화원 같은 것을 생각한다 그곳에는 처음도 끝도 없는 위로를 위해 처음 본 사람이 필요했고 자신의 수명을 모르는 꽃들만 살아남았다
오늘 중얼거리던 이방(異邦)은 내가 배운 적 없는 시제에서 피는 또 하나의 시제, 오늘 자신의 수명을 모르는 꽃은 내일 자신의 이름을 알게 된다
구름은 어느 쪽이건 죽은 자의 머리칼 냄새가 나고 중국 수정 속으로 들어간 곤충의 무심한 눈 같은 어느 날
사람의 눈으로 들어온 시차가 구름의 수명을 위로한다
[감상]
추억의 어느 부분을 기억하려면 그 즈음의 여러 풍경을 거쳐야 합니다. 의식이 저장해놓은 데이터는 이처럼 파편적이면서 유기적으로 생을 엮어냅니다. 이 시는 ‘기억’ 속에 자리한 결정적인 순간들을 구조화시키는 데 탁월함이 돋보입니다. 마치 롤러코스터가 가라앉았다가 솟구쳤다가 다시 지상으로 내러섰을 때의 느낌. 문장의 의미를 쫓아 시인이 만들어 놓은 내면의 레일을 따라 가다보면 어느덧 ‘연두’의 색감에 가닿습니다. ‘누구보다 농밀하게 모국어의 속살을 사랑하고 그것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사람’이 시인이라고 말하는, 그 향일성에 독자의 생각들이 자라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