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어먹을, 차가운 심장》/ 허수경 (1987년 『실천문학』으로 등단) / 《문학동네 시인선》002
오래전에 잊은 이의 눈썹
푸른 안개의 품 안에 배나무가 떨고 있다오
가지에는 아직 땅에 떨어지지 않은 배 하나가 달려 있다오
안개가 걷히면서 바람 부는데
농익은 배 향기는 은은하게 울려온다오
종소리를 듣는 것 같아
배나무의 영혼은 먼 소리처럼 떤다오
오래전에 잊은 어떤 이의
눈썹 같은 게 차올라왔다오
[감상]
눈을 감고 있으면 안개 낀 어느 정원이 펼쳐집니다. 그곳 농익은 배나무의 배 하나, 조용히 향기로 습기를 머금습니다. 그리고 그 향기는 안개에 섞이고 바람에 섞이겠지요. 향기를 ‘종소리’로 비유하는 기막힌 표현이 ‘은은하게’에 집약됩니다. 그리고 그 종소리의 떨림이 눈썹으로 이어집니다. 그 사람의 속눈썹을 가만히 들여다볼 수 있는 관계였다면 더 아련한 ‘잊음’이겠지요. 섬세하고 부드러운 감각이 배의 싱그러움과 맞물려 詩로서의 새로운 심미를 느끼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