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아의 잠/ 김기택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일상에은 많은 동물, 식물, 그리고 눈에 보이지만 문학적으로 감지하지 못한 많은 것들이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김기택의 시들은 그러한 문학적 접근에 대한 관찰은 세밀하기 그지없다. 마치 시인의 눈은 현미경처럼 세밀한 관찰을 통하면서 거기서 얻어지는 세상 이치를 스스럼없이 끌어내고 있는 것이다.
처음 김기택을 신춘문예에서 접했을 때는 그가 그러한 시를 쓸 수 있으리란 생각을 미처 하지 못했었다. 왜냐하면, '꼽추'에서 보이는 절창의 모습은 선이 굵고 묵직한 글을 연상했기 때문이었다.
지하도
그 낮게 구부러진 어둠에 눌려
그 노인은 언제나 보이지 않았다.
출근길
매일 그 자리 그 사람이지만
만나는 건 늘
빈 손바닥 하나, 동전 몇 개뿐이었다.
가끔 등뼈 아래 숨어 사는 작은 얼굴 하나
시멘트를 응고시키는 힘이 누르고 있는 흰 얼굴 하나
그것마저도 아예 안 보이는 날이 더 많았다.
하루는 무덥고 시끄러운 정오의 길바닥에서
그 노인이 조용히 잠든 것을 보았다.
등에 커다란 알을 하나 품고
그 알 속으로 들어가
태아처럼 웅크리고 자고 있었다.
곧 껍질을 깨고 무엇이 나올 것 같아
철근 같은 등뼈가 부서지도록 기지개를 하면서
그것이 곧 일어날 것 같아
그 일이 유난히 크고 위태로워 보였다.
거대한 도시의 소음보다 더 우렁찬
숨소리 나직하게 들려오고
웅크려 알을 품고 있는 어둠 위로
종일 빛이 내리고 있었다.
다음날부터 노인은 보이지 않았다.
- 곱추, 전문
'곱추'의 마지막 연은 '다음날부터 노인은 보이지 않았다.'란 말로 끝이 난다. 시의 앞 부분에서 충분히 언급한 지하도의 풍경과 정오의 그 노인의 나른함을 느끼다가 서서히 죽어가는 노인의 형상을 생각하니 뒷덜미에서부터 오는 전율은 실로 오랜만에 느껴보는 섬뜩한 감동이었다.
네가 약하다는 것이 마음에 걸린다
작은 충격에도 쉬이 깨질 것 같아 불안하다
쨍그랑 큰 울음 한번 울고 나면
박살난 네 몸 하나하나는
끝이 날카로운 무기로 변한다
큰 충격에도 끄떡하지 않을 네가 바위라면
유리가 되기 전까지 수만 년
깊은 땅속에서 잠자던 거대한 바위라면
내 마음 얼마나 든든하겠느냐
깨진다 한들 변함없이 바위요
바스러지다 해도 여전히 모래인 것을
그 모래 오랜 세월 썩고 또 썩으면
지층 한 무늬를 그리며 튼튼하고 아름다운
다시 바위가 되는것을
누가 침을 뱉건 말건 심심하다고 차건 말건
아무렇게나 뒹굴어다닐 돌이라도 되었다면
내 마음 얼마나 편하겠느냐
너는 투명하지만 반들반들 빛이 나지만
그건 날카로운 끝을 가리는 보호색일 뿐
언제고 깨질 것 같은 너를 보면
약하다는 것이 강하다는 것보다 더 두렵다
- 유리에게, 전문 (36쪽)
또한 '유리에게'에서 보이는 시인의 사물에 대한 인식은 실로 놀랍고도 예리한 부분이 인지된다. '언제고 깨질 것 같은 너를 보면/ 약하다는 것이 강하다는 것보다 더 두렵다.' 이 얼마나 유리에 대한 성질을 우리의 일상과 교묘하게 접목시킨 대목인가. 절로 감탄사가 나온다.
우리의 일상은 욕망과 점철되는데 그 욕망 중에 빠질 수 없는 것이 '밥먹는 일(56쪽)'일 것이다. 그것은 밥이라는 매개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먹기 위해 살 수도 있다는 다분히 비관적 생각을 할 수 있다. 그러나 김기택은 그의 시에서 어떻게 토로하는가. '그 중에서도 가장 힘든 일은 「밥먹는 일」이란다.' 라고 진술하지만 아이들은 고개를 갸웃할 뿐 웃기만 한다. 그렇다. 옛시조의 것처럼, '왜 사냐건 웃지요.'라는 대답과 상통하는 대목일 것이다. 어쩌면 아이들은 그런 달관의 경지를 각박하게 단지 먹고 살기 위해 살아가는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시간의 개념에서 바라볼 때 먹는 것과 아이가 자라나 어른이 되는 것은 일종의 순서일뿐 아직 오지 않는 시간일 것이다. 먹고 나서 일정시간이 지나면 배가 고프기 마련이고, 아이는 자라고 싶지 않더라도 자라나 가장이 되어 먹을 것을 걱정하기 마련인 것이다. 그러한 생각에서 보면 '7시는 8시를 위하여 언제나 불안하다(8시, 52쪽)'라는 말은 맞는 말로 들린다.
7시는 나를 거칠게 일으켜세워 예리한 분침과 초침으로 내 몸을 알맞게 등분한다. 먼저 익숙하게 엉덩이를 베어내어 변소에 던져버린다. 다음은 얼굴을 잘라 거울과 면도기와 함께 세숫대야에 처박아놓는다. 여기저기 널브러진 팔다리들은 허겁지겁 이불을 개고 옷을 입고 넥타이를 매고 구두를 신는다.
8시가 오는 것이 두려우면서도 나는 8시를 향해 달려간다. 어제 지나갔던 발자국들을 정확하게 밟으면서, 표정 없는 사람들이 초침처럼 조급하게 지나가는 7시와 8시 사이를 지나.
아무런 생각도 없이 수많은 사람들이 7시의 거리에 쏟아져나온다. 그 많은 사람들이 들어가기에는 8시의 입구가 너무도 좁다. 7시의 곳곳에 흩어져 있던 사람들이 일시에 8시의 좁은 입구로 몰려든다. 나도 그들과 함께 초침이 가리키는 눈금과 눈금 사이 좁은 틈을 비집고 들어간다.
- 8시, 52쪽
시간의 개념 속에서 삶을 예리하게 분침과 초침에서 찾은 이 시는 비유가 참신하고 그 가운데 작품성 또한 돋보이는 작품이라고 볼 수 있겠다.
나는 시는 진보하는 것이 아니라 진화한다고 믿고 싶다. 인식함 그 자체로 진화의 개념에서, 하나씩 도태될 것은 도태된 상태에서 보다 나은 선택의 기로에 서야할 것이다. 시가 우리에게 주는 의미를 생각한다면 분명 김기택은 나에게 진화로 통하는 또 한 가지 방법을 제공한 것이리라.
태아의 잠, 꿈을 꾸듯 탯줄에 매달린 아이의 잠에서 우리는 살아갈 날들에 대한 희망으로 가득찬 미래를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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