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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의 언어, 어둠 뒤의 희망



김충규, 『낙타는 발자국을 남기지 않는다』(다층)



글 : 윤성택



  98년도였다.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 최종심 평을 읽다가 김충규 "낙타"를 알게 된 것이. 그 당시 심사평에서 "단 한편만으로 뽑는 신춘문예의 속성을 고려한다면 "낙타"를 뽑아야 했을 것이다"의 평에 시선이 머물렀다. 대체 어떤 詩이길래 심사위원이 구구한 미안함을 표명했을까. 최종심에 올라 탈락한 시인지라, 나는 내내 궁금해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는 그해 가을 즈음에 계간지 "문학동네"를 보다가 김충규 시인의 등단 소식과 함께 화제의 그 시를 보게 되었다. 나는 시를 읽는 순간 이끌리는 묘한 기운, 마치 낙타 한 마리를 詩로 끌어와 살아본 것 같은, 그리하여 그 낙타가 영원히 살아 있게 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런 그의 "낙타는 발자국을 남기지 않는다 (다층)"의 시집을 읽을 수 있게된 것은 크나큰 기쁨이다.



  나의 집으로 낙타가 들어왔다 쉴 곳을 찾았다는 듯이 길게 숨을 토했다 맑은 눈에선 고행의 흔적을 엿볼 수 없지만 살점 없이 앙상한 다리는 한없이 지쳐 보였다 낙타와 함께 지내기엔 집이 너무 좁아 나는 낙타를 달가워하지 않았다 느닷없이 낙타가 등을 낮췄다 나더러 올라타라는 것인지 푸르르 몸을 털었다 나는 낙타의 등에 올라타지 않았다 나는 사막을 지키는 전사가 아니므로 더구나 순례든 고행이든 사막으로 떠날 계획이 없었으므로 낙타를 집 밖으로 몰아낼 생각만 하고 있었다 내가 자신의 등에 올라타지 않자 낙타는 그만 풀썩 주저앉더니 지그시 눈을 감았다 내가 눈을 깜빡이는 사이 낙타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눈앞에 무덤 하나 덩그러니 앉아 있었다

                                                - 「낙타」 전문, 13쪽


  쉴 곳이 필요한 먼길을 걸어온 낙타, 그 낙타를 달가와 하지 않는 화자. 이 묘한 대별구도가 이 시의 흡입을 이끌어내는 중요한 모티브가 된다. "살점 없이 앙상한 다리는 한없이 지쳐 보였다"에서 볼 수 있듯이 낙타는 어쩌면 이승의 저편에서 걸어왔을지도 모른다. 그곳에서 돌아온 낙타는 무언가를 보여주기 위해 "등을 낮"추며 화자에게 단 한 번의 기회를 주었으리라. 그러나 화자가 그런 기회에 응하지 않자, 결국 낙타는 무덤이 된다. 이승의 삶을 무덤으로 완성한다는 듯, 이승저편에서 무덤하나 이고 왔다는 듯 지그시 눈을 감은 것이다.
  이런 김충규 시인의 시편들은 세상을 온몸으로 받아들여, 그 어둠과 고통 속 의미를 끄집어내 탁월한 메타포들로 넘실거리게 한다. 그리하여 시인은 세상과 자연의 모든 것들을 하나 하나 음복하듯 취하는 동시에, 육화된 몸의 언어로 다시 불러 세운다.



캄캄한 하늘, 달이 떴다
바닥을 드러낸 우물같은.
폐허가 그 속에 웅크리고 있다.
이루지 못할 꿈 너무 많아
나는 지상을 예찬하지 못한다.
폐허의 모진 발자국이
내 몸을 찍어 눌렀다.
내가 달을 보는 까닭은,
달의 폐허가 내 속의 폐허를 읽기 때문이다.

                        - 「달」 전문, 21쪽


  어쩌면 달은 우리의 생명을 같이한 연원의 그 무엇일지도 모른다. 시인은 그런 이미지를 포착해낸다. "지상을 예찬하지 못"하는 폐허, 그것이 죽음이든 아니든 화자는 달과 소통되는 합일된 정서를 겪어낸다. 이것은 달이 화자의 폐허를 읽음으로써 화자가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거울자아 역할이기도 하다. 결국 그가 말하는 자연은 "저수지 앞에 서면 내속의/ 저수지의 바닥이 욱신거"려 "물 속을 헤엄치는 물고기"조차 "저수지의 상처가 키운 것"(「저수지」, 16쪽)이 되며, "내 생은 왜 물 한번 오르지 않나?"의 의문으로 출발하여 "내 생은 뿌리가 약한 나무임을"(「저녁」, 33쪽)으로 나아가는 합일된 정서의 지표가 되기도 한다.

  한편, 이런 자연을 볼모로 성장하는 문명의 반감 때문이었을까. 시인이 바라보는 도시의 모습들은 항상 어둡고 그늘져 있다. 그 속에 살아가는 화자조차 도시의 소도구로 전락되거나, 쥐들이나 밤고양이들과 함께 소외된다.



고양이로 하여금 쓰레기를 찢도록 한 것은
생선 찌꺼기의 비린내였나
고양이 한 마리가 쓰레기 봉지를 찢고 있다
새끼들이 어딘가에서 떨며 기다리고 있는 것일까
고양의 눈은 터널처럼 깊고 그 속엔
어둠이 고여 있다 그 어둠을 파내어
내 눈에 바르면 나도 저것처럼 쓰레기 봉지를 뒤지는
슬픈 아비가 될까
마흔이 내일 모레인데 자식들은 겁도 없이
가시로 내 생을 쿡쿡 찌르며 자란다
아내는 도망치듯 취직을 하고 폐결핵에 걸린 나는
한동안 붉은 각혈을 하다 아침마다 한 줌씩 알약을 먹으며
헉헉거린다 거울을 보면 내 눈빛은 차츰 흐릿해져간다
손톱으로 거울을 찢고 거울 속의 나를 끄집어내어
눈을 후벼 파고 싶은 나날들
고양이는 쓰레기 봉지를 거침없이 찢어놓고
사라졌다 쓰레기 봉지를 테이프로 봉합하며
너덜거리는 내 생은 무엇으로 봉합하나

나는 언제나 고양이를 기다린다

                        - 「나는 언제나 고양이를 기다린다」 전문, 14쪽



  이 시에서 시인은 고양이가 찢는 쓰레기봉지와 화자의 삶을 절묘하게 잇대어 놓는다. 삶에 대한 절박함은 이내 고양이의 발톱으로 변이되거나, 고양이의 눈으로 투영된다. 화자가 앓는 폐결핵은 자연을 잃은 자아의 피폐된 징표이며, 가족의 모습은 각박한 삶의 쓸쓸한 뒷모습이 된다. 이렇듯 소시민으로 살아가는 화자의 삶은 "너덜거리는 내 생은 무엇으로 봉합하나"의 자문만 남길 뿐, 삶은 다시 고양이의 것으로 되고 만다. 결국 도시는 "무성한 빌딩의 숲 속을 헤매는 영혼들"(「사랑하는 도시」, 22쪽)로 가득 차며, "사람과 사람 사이로 구정물"(「사람과 사람 사이로」, 41쪽)이 흐르고, "복개천은 죽은 태아들의 소굴"「싸락눈 싸락싸락 오는 밤」, 37쪽)이 된다.

  그러나 시인은 이 절망과 어둠의 것들을 온몸으로 끌어안고 희망을 꿈꾼다. "사막의 시편"에서 볼 수 있듯이 사막의 길을 걸으며 통과의례와도 같은 긴긴 여정 끝에 도달하여, 세상의 가장 빛나는 부분들을 읽어내기 시작한다. 어둠의 깊이를 잰 사람만이 희망의 촉수를 감지는 것처럼, 세상의 아름다운 것들에게 생명과 희망의 온기를 불어넣는다.



밤사이 목련나무가 활짝 꽃 피웠다
우리 잠든 깊은 밤, 천상의 물고기 떼가 내려와서
주둥이로 멍울 어루만졌던가
뭉쳐 있던 멍울들 다 터져 꽃이 되었다
너무 희어서 실핏줄이 환한 꽃,
몇 올의 실핏줄 터져 약간
붉은 기운이 도는 꽃,
멀리서 찾아온 바람이
단내를 꽃잎마다 적셔준다
목련나무 너머는 콘크리트 골목길,
골목길과 목련나무 사이엔
교과 같은 담벼락이 서 있다

이런 날은, 교과서는 아예 펼치지 말자
이런 날은 지짐이 한 접시에 막걸리 두어 잔,
흥얼흥얼 콧노래에 취해 보자
그런들 내 속에 맺힌 멍울들 터지겠냐마는,
터져 환한 꽃 되겠냐마는.

                        - 「목련꽃을 보라」 전문, 97쪽  



  목련꽃을 바라보는 시인의 눈은 살갑다. "우리 잠든 깊은 밤, 천상의 물고기 떼가 내려와서/ 주둥이로 멍울 어루만졌던가"의 놀라운 발견은 비단 목련꽃 뿐 아니라 풍경 하나 하나에 깃들기 시작한다. 자목련은 "너무 희어서" "몇 올의 실핏줄 터져 약간/ 붉은 기운이 도는 꽃". 이 얼마나 뛰어난 비유인가! 이는 분명 "막걸리 두어 잔"에서 우러나는 바특한 마음의 온기로 남는다. 이러한 애정은 "꽃잎 다 떨구고 기침하다가 기침하다가 잎사귀마저 다 떨구고 선 나무 아래 들면 내 몸이 나무의 그늘같이 느껴진다 … 나무를 껴안는다 나무의 숨결은 따뜻하다"(「미소」부분, 92쪽)에 포근하게 드러나며, "하루는 너무 길고 어둠은/ 너무 깊고 깊어 처연하게/ 처연하게 우는 벌레들 서로의/ 상처를 핥으며"(「벌레들」부분, 104쪽)에서처럼 공존하는 삶의 가치를 깨닫게 한다.

  나는 좋은 시는 사람을 불러모은다는 말을 믿는다. 또한 시인이란 세상의 변화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는 자들이며, 그 변화를 선취하고, 그 세상을 앞서서 사는 자들이라는 말을 믿는다. 김충규 시인이 그러하듯, 세상의 시인이 그러하듯 어둠을 딛고 일어선 삶은 또다른 모색의 발로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