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아버지에 대한 편린
아버지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잠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가습기가 피워 올린 추억에 젖어 어디까지 가신 걸까. 하루 종일 링겔은 끝없는 타전을 보내지만 부산한 숫자의 기계들만 그 위치를 가늠할 뿐, 아버지는 몸의 주파수를 잃은 채 영영 돌아오지 못할 산행을 떠나신 것만 같았다. 아버지 힘겨운 숨질을 하실 때마다 잎 죄다 떨군 창가 은행나무처럼 앙상한 쇠골이 흔들렸다. 중환자실 의자의 새벽, 아버지가 맨발로 걸어와 내 곁에 앉았다. 그리고 하얗게 웃고만 계셨다. 아버지 아버지, 어디쯤 가고 계신건가요? 아버지는 서서히 맥박의 기별을 지우며 인공호흡기 너머 둥그렇게 벌린 검은 입 속 우주 어딘가로 남김없이 생을 전송시키고 있었다. 손금을 환하게 거둬들인 햇살이 자꾸만 창가에 넘쳐났다. 그리고 아버지는 영영 돌아오지 않으셨다.
누구에게나 아버지에 대한 아련한 기억이 있다. 끝내 가실 길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막상 그 앞에서 초연해질 수 없는 것이 인간이 아닌가 싶다. 3년 전 아버지가 암으로 떠나실 때 새삼 나는 아버지의 삶 앞에서 눈물의 의미를 알았다. 시간이 흐른 지금, 아버지는 이제 낡은 사진 속에서 내게 종종 이야기를 들려주신다. 아버지가 살아왔던 역경과 인생, 아픔과 상처를 생각해볼 때 어쩌면 나는 아버지의 삶을 이렇게 대물림 받으며 시간을 헤쳐 가는지도 모른다. 나도 언젠가 빛바랜 사진 속 아버지로 늙어 어린 자식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게 될 것이다.
언젠가 자동차로 시골길을 가고 있었는데 갑자기 길이 막혀 창문을 내리고 밖을 내다보았다. 경운기 한 대가 천천히 언덕을 오르고 있었고, 그 뒤로 자동차들이 뒤따르고 있었다. 길이 좁은 탓이었다. 밀짚모자와 고무신의 아버지가 거기 있었다. 나는 아버지에 대한 시를 다음과 같이 썼다. 그리고 나도 언젠가 아버지가 되어 그 길에 들어설 것이다.
경운기를 따라가다
모퉁이 돌아 나온 소리,
아버지보다 먼저 도착했었네
결 굵은 앞바퀴가 땅 움켜쥐고 지나간 길, 언제나
멀미처럼 먼지 자욱한 비포장 도로였네
그 짐칸 올라타기도 했던 날들 어쩌면
덜컹덜컹 떨어질까 손에 땀나는 세월이었고
여태 그 진동 끝나지 않았네 막막한 시대가
계속될수록 나를 흔드는 이 울림, 느껴지네
밀짚모자와 걷어올린 종아리, 흙 묻은 고무신의
아버지와 아버지의 길
양손 벌려 손잡이 잡고 몸 수그린 채
항상 삶에 전투적이었던 운전법,
아버지!
그만 돌아오세요 이젠 어두워졌어요
나는 보네
울퉁불퉁한 것은 이제 바닥이 아닌 바퀴이어서
일방통행길 높은 음역으로
더듬거리듯 가고 있을 때
숨죽이며 따라가는
한때 속도가 전부였던 자동차 붉은 꼬리의 생각들,
나는 아직껏 아버지를 추월할 수 없네
* 월간 『오뜨』2004년 5월호 게재
윤성택님 글 자주 와서 볼려고 회원가입한 사람예요
한번도 자애롭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던 저의 아버지에 관해 많은걸 돌아보게 한 글입니다
그동안 내가 미워했던게 어쩜 아버지가 아니라 그토록 화가 나 있어야만 한 내가 가둬온 시간들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
아까시아향기가 유리창을 깨고 흘러 들어올것만 같이 보이는 집 앞 작은 언덕의 그림들을 보내드리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