똥구멍으로 시를 읽다
고영민
겨울산을 오르다 갑자기 똥이 마려워
배낭 속 휴지를 찾으니 없다
휴지가 될만한 종이라곤
들고 온 신작시집 한권이 전부
다른 계절 같으면 잎새가 지천의 휴지이련만
그런 궁여지책도 이 계절의 산은
허락치 않는다
할 수 없이 들려 온 시집의 낱장을
무례하게도 찢는다
무릎까지 바지를 내리고 산중턱에 걸터앉아
그분의 시를 정성껏 읽는다
읽은 시를 천천히 손아귀로 구긴다
구기고, 구기고, 구긴다
이 낱장의 종이가 한 시인을 버리고,
한권 시집을 버리고, 자신이 시였음을 버리고
머물던 자신의 페이지마저 버려
온전히 한 장 휴지일 때까지
무참히 구기고, 구기고, 구긴다
펼쳐보니 나를 훑고 지나가도 아프지 않을 만큼
결이 부들부들해져 있다
한 장 종이가 내 밑을 천천히 지나간다
아, 부드럽게 읽힌다
다시 반으로 접어 읽고,
또다시 반으로 접어 읽는다
-『시와정신』여름 시인학교 낭송시 (2004. 8)
똥구멍에 힘 주시라!
윤성택
후련하다! 생물학적인 욕망을 미적 경험으로 해갈시키는 독특한 체험이라니. 그러니 시는 머리로 읽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읽어야 한다는 말을 몸소 실천한 셈이다.
시는 그야말로 존재의 집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그 집을 고고한 성채로 만들었고, 몸을 소외시킨 채 정신의 것들과 살아왔다. 그 안에서 자라난 폐쇄적인 자의식과 모호하고 난해한 시들이 현대시를 대변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보는 것과 감각적인 것을 더 선호하는 이 시대에 시가 점점 변방으로 밀려가는 것이 아닐까.
시인은 신작시집을 똥구멍으로 읽어낸다. 그 어떤 관념이 아닌, 몸의 모든 촉각으로 경험할 수 있는 생생한 실체로 읽어낸다. 모든 활자를 버리고 ‘온전히 한 장 휴지’가 될 때 시는 기어이 부드럽게 읽힌다. 결국 진정한 시는 고고한 정신이나 낭만적인 것이 아니라, 산에서 마려운 똥처럼 절박한 실존의 것이라 말하고 있다.
또한 항문은 문의 일종이다. 나가려는 성질이 문을 만들 듯 똥구멍이라는 문은 몸이라는 처소에서 소화된 것이 흘러나오는 득음의 경계이다. 이것은 시각을 뛰어넘은 것으로서, 욕망을 동력으로 한 육체의 최고 감각기관인 셈이다. 냄새나고 지저분한 똥구멍으로 읽어내는 시란 또 얼마나 본질적인 것인가.
낱장의 종이가 한 시인을 버리고,/ 한권 시집을 버리고, 자신이 시였음을 버리고/ 머물던 자신의 페이지마저 버려/ 온전히 한 장 휴지일 때까지/ 무참히 구기고, 구기고, 구긴다
시를 통해 얻어지는 것이 감동이라면 그것은 일상적 의미의 감동이 아니다. 그 감동은 시인에 의해 해체되고 다시 읽는 이의 체계에 의해서 질서화되는 것이다. 시인을 느끼되 그런 느낌을 버리고, 시에서 자신을 느끼되 그 생각을 버리고, 결국 모든 것을 버렸을 때 시가 지향하는 세계의 황홀을 느낄 수 있다. 마치 불교가 오욕칠정(五慾七情)을 버리고 마음을 비울 때 열반에 들 수 있듯 말이다. 몸을 만족시키지 못하는 문학이란 더 이상 존재할만한 이유가 없다는 니체의 말처럼, 이 시는 몸으로 느끼고 몸으로 말한다. 똥구멍이 느끼는 감성적 반응이 한 편 시를 빚어내고 접어 읽게끔 만든다.
한 해에 수많이 시들이 각종 잡지에 발표되고 사라진다. 혹은 어떤 시는 단 한 번도 문예잡지 페이지에 빛을 들이지 못하고 어느 서가에 꽂혀 있거나, 재생공장으로 사라지기도 한다. 또 한편으로 제대로 발표되지 못한 좋은 시가 인터넷을 떠돌기도 한다. 이 시는 우연히 인터넷에서 보게 된 시로 그 발표 출처를 다시금 확인해야하는 절차를 밟아야 했다. 인터넷이 가져다준 쌍방향 소통의 영향일까. 글을 쓰는 지금 이 시각에도 이 시는 곳곳의 문학 사이트나 카페, 블로그에 복제되어 ‘좋은시’라는 항목으로 순회를 벌이고 있을 것이다. 이러다 똥구멍으로 시를 읽는 법이 전국적으로 유행하게 되면, 시가 적혀 있는 화장지가 신상품으로 선보일지도 모를 일이다. 괄약근은 수많은 휴지를 눈동자처럼 훑어낼 것이며, 어떤 식으로든 일생동안 독서는 멈추지 않을 테니까. 이 시대 시인들이여, 똥구멍에 힘 주시라! ― 《현대시학》 2004년 12월호 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