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지, 편지에 대해서라면 나도 할말이 많아진다.
그 시작은 인생이 뭔지, 문학이 뭔지도 몰랐던
초등학교 6학년. 국군의날 위문편지 쓰기.
생각지도 않았던 답장이 왔다.
"어떻게 펜 하나만으로 저렇게 예쁜 카드를 만들수 있지?"
첫번째 편지에 대한 나의 첫인상은 그거였다.
카드를 열자 작은 글씨들이 총총이 들어차 있었다.
저녁을 먹고 나면 허물없이 찾아가 차 한 잔을 마시고 싶다고 말할 수 있는 친구가 있었으면 좋겠다.
입은 옷을 갈아입지 않고 김치 냄새가 좀 나더라도 흉보지 않을 친구가 우리 집 가까이에 있었으면 좋겠다. 비오는 오후나 눈 내리는 밤에 고무신을 끌고 찾아가도 좋을 친구, 밤늦도록 공허한 마음도 마음놓고 보일 수 있고, 악의 없이 남의 얘기를 주고받고 나서도 말이 날까 걱정되지 않는 친구가... 사람이 자기 아내나 남편, 형제나 제 자식하고만 사랑을 나눈다면 어찌 행복해질 수 있으랴. 영원이 없을수록 영원을 꿈꾸도록 서로 돕는 진실한 친구가 필요하리라. 그가 여성이어도 좋고 남성이어도 좋다. 나보다 나이가 많아도 좋고 동갑이거나 적어도 좋다. 다만 그의 인품이 맑은 강물처럼 조용하고 은근하며 깊고 신선하며 예술과 인생을 소중히 여길 만큼 성숙한 사람이면 된다. 그는 반드시 잘생길 필요가 없고, 수수하나 멋을 알고 중후한 몸가짐을 할 수 있으면 된다. 때로 약간의 변덕과 신경질을 부려도 그것이 애교로 통할 수 있을 정도면 괜찮고 나의 변덕과 괜한 흥분에도 적절히 맞장구를 쳐주고 나서, 얼마의 시간이 흘러 내가 평온해지거든 부드럽고 세련된 표현으로 충고를 아끼지 않았으면 좋겠다. - 유안진 님의「지란지교를 꿈꾸며」중에서 -
이글과 지금은 기억도 나지않는 몇가지 메세지들.
이것으로 시작해 우리는 횟수로 7년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 할때까지 계속해서 편지를 주고 받았다.
너무나 오래전 일이라 지금은 기어도 희미해졌지만
또렸이 기억나는 그의 대한 몇가지 기억들 .
그는 산업미술학과를 다니다 군대를 간
나와는 여덟살 차이나는
글을 아주 잘쓰고 그림도 잘 그리고
목소리도 좋았던 윤수환아저씨.
그는 나와 펜팔을 하던 7년중 5년 동안은 가명을 썼었다.
뭐였더라??? 기억이 나지 않는다.
본명을 아직까지 또렷이 기억하는건
김수환 추기경을 내세워 자기의 이름을 설명했기 때문이다.
그는 제대후 아르바이트로 전에 하던 음악다방 DJ를 다시 했다.
가끔 집에서 테잎을 만들어 선물해 주기도 했다.
그 노래들 다 좋았었는데
그중 진이 컴 컴언... 어렇게 시작하는 팔코의 <진이>가 생각난다.
밤마다 그가 녹음해 준 노래들을 들으며
편지를 쓰고 일기를 쓰며 성숙해 갔다 .
생일이면 편지지 한편에 내가 보내 주었던 사진을 의지해
내 얼굴을 그려주곤 했었다.
우리는 그렇게 7년을 펜팔을 하면서도
전화만 가끔 했을 뿐 한번도 만나지 않았다.
7년이된 어느날 밤 술에 얼큰하게 취해
상기되고 혀꼬부라지는 소리로 전화를 했다.
한번 만나자고...
그의 말을 듣는 순간 갑자기 두려웠다.
그래서 엄마한테 혼난다고 하고서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도 몇 통의 전화가 더 걸려왔었다.
그 전화 이후 나는 차츰 그를 멀리했고
우리의 편지는 점점 줄어갔다.
그렇게
그렇게 끝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