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홀한 밤- 연극 [가우데아무스]를 보고
7월10일 밤 LG아트센타에서 마지막 공연한 러시아 연극
[가우데아무스]는 포복절도케 하는 희극적인 요소가
일상에 찌들어 있던 경직된 안면 근육을 부드럽게도 했지만
머리가 쭛벽 서게하는 짜릿한 전율과, 배우 한 명 한명이
억눌하고 작위적인 대사와 몸으로 하는 연극이 아닌 파레트에
풀어 놓은 영혼으로 그림을 그리 듯 살아 꿈틀거리는 역동적인 연극이였다.
[가우데아무스]는 옛 소비에트시절 건설부대(CONSTRUCTION.BATTALION)
안에서 일어났던 19개의 에피소드가 상상을 뛰어넘는 눈덮인 평면
무대에서 시작된다.개인적으로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무대였다.
경사진 무대는 눈으로 덮여 있는데, 느닷없이 이 눈 쌓인 바닥 곳곳에
사각형의 구멍이 생겨나 배우들이 이곳으로 등장하거나 사라진다.
이 구멍들은 바로 병사로 분한 배우들의 문이자 똥통이자 꿈의 분출구로,
연극에 사용하는 소품이 드나드는 역할까지 하는 아주 기발한 통로로
사용되어지는 발상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우선 연극에 동원된 요소를 보면 극안에는 다양한 장르가 끊임없이
어우러지는데 성악,발레,악기연주,체조,마임,춤과 노래를 무대언어로
어색함 없이 자유자제로 이어지는 스피드와 자연스러움에 절로 감탄이 나왔다.
[가우데아무스]는 열정과 환희의 상승 모멘트가 있고 차갑고 응축된
하강 모멘트가 있는 숨가뿌고 스피드한 연극이라 생각이 들었다.
연극적 리듬은 다양한 음색의 악기, 다양한 쟝르의 노래 사용, 춤,
오브제를 통한 이미지 등을 통해 강조한 완벽한 연극이었다고 극찬하고 싶다.
[가우데아무스]에는 총 17명의 배우가 나오는데 극의 배경이 군부대로
13명의 남자배우와 4명의 여자배우가 나오는데 한 여자 배우는 눈 짐작으로
가히 150kg이 넘는 남극의 백곰같은 거구로 극의 흐름을 리드미칼하게
소화하는, 아니 리드하며 춤추며 노래하는 열정에 고개가 절로 저어지게 했다.
그렇다 프로는 아름답고 진정 황홀한 존재 였다.
남자 배우 중에는 갓 20세도 안되보이는 가냘픈 몸매로 땀 벅벅이 되어
열연하는 모습이 한 마리 노루같아 무대 위로 뛰어가 안아주고 싶은 충동을
억지로 참을 수 밖에 없었다.
극 중에 여배우가 가슴을 드러내고 의상을 바꿔 입는 장면이나 반나로
(하얀 삼각팬티)만 입고 춤을 추는 남자 배우의 자유로움에 내 내면의
은밀한 길모퉁이에 숨어있던 욕망은 처참히 땅에 주저앉고 말았다.
각자 개성 있는 군인으로서의 캐릭터를 훌륭하게 소화해 낸 13명의
물개같은 배우들이 군복을 벗어 젖히고 트렁크만 입고 오열하며 뒹굴고
춤을 출 때는 나는 아찔한 현기증에 잠시 눈을 감고 말았다.
애써 귀한 마지막 날 티켓을 구해서
공연에 초대해 준 부드러운 지인에게 감사를 보낸다.
*** 러시아를 대표하는 상트 페레트부르크에 있는 말리극장의 예술감독
"레프 도진" 대한 김윤칠 연극평론가의 글이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동시대에 위대한 연출가 "레프 도진"
내가 레프 도진이란 러시아의 연출가를 직접 경험한 것은 2000년 4월이었으니 아주 최근의 일이다. 이태리 시실리 섬의 작은 문화도시 타오미나에 그가 유럽연극상을 수상하러 왔을 때였다. 유럽연극상은 어떤 의미에서 우리에게 서구연극에 대한 창의 역할을 해주는 중요한 행사인데, 이 행사가 흥미로운 것은 시상식 자체보다 수상자를 위한 콜로키엄, 수상자의 기념공연 등 그 부대행사들 때문이다. 피터 브룩, 아리안느 므누쉬킨, 로버트 윌슨, 피나 바우쉬 등의 역대 수상자들과 올해의 수상자 미셸 피콜리 등의 면모를 보면 이 상은 가히 현대유럽연극을 대표한다고 해도 크게 과장되지 않는다. 그러한 수상자들의 반열에 레프 도진이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를 위한 콜로키엄과 그가 연출한 <집>, <몰리 스위니> 등의 기념공연을 통해 도진이 그러한 평가를 받는 것이 너무나 당연하다고 믿게 되었다. 특히 도진의 연극 만들기의 특징이 고스란히 반영된 <집>의 관극 체험은 나의 연극인생에 있어서 가장 감동적인 체험 가운데 하나였다.
우선 그에 대한 우리의 지적인 호기심을 충족시키기 위해 지난해 유럽연극상의 심사평을 다시 들어보자.
스타니슬라브스키의 가장 충성된 추종자중 한 사람으로부터 수학한 레프 도진은 아주 어릴 때 고향인 시베리아를 떠나 옛 러시아의 오래된 도시들을 전전했다. 그는 실제와 결코 격리되지 않는 교육방법을 개발하는 데 평생을 바쳐왔으며, 이는 앙상블 공연과 워크샵을 신봉하는 그가 확대된 가족 개념으로서의 극단을 창단할 때의 출발점이었다. 그 뒤 1983년 그는 말리극장의 예술감독으로 부름을 받았고 지난 20세기의 마지막 20년 동안 동 극단을 세계적인 극단으로 발전시켰다. <집>은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연극학교 졸업생들로 구성된 그의 극단원들이 소설가 표도르 아브라모프가 농부들의 시련과 고난을 다룬 그의 소설을 집필했던 북부의 마을에서 수개월을 보낸 뒤 희곡으로 탄생되었다. 이 희곡은 도진의 <형제자매들>에서 발견되는 실제 삶의 진실한 분위기를 살리기 위해 즉흥연기를 활용하여 무대적으로 각색되었다. 집단농장에 대한 이 비극적 대서사시는 눈물과 웃음으로 가득한 8시간의 감동적 공간 안에서 벌어지며 연출자 도진이 가장 좋아하는 주제인 ‘위대한 러시아의 영혼’의 깊이를 측량한다. 그는 특히 소설들을 극장용으로 각색하면서 러시아의 역사를 새롭게 분석하여 많은 논쟁을 일으키기도 했다. 이러한 작업의 대미는 오랫동안 금지되어왔던 도스토예프스키의 고전 <악령>을 무대에 올린 것이었다. 이 작품을 위해 도진은 3년 동안 연습했고, 말리극장은 감동적인 대사와 행동으로 가득한 이 10시간 짜리 대작을 지난 9년 동안 해마다 정기적으로 무대에 올렸다. 여기서 이미 안드레이 플라토노프의 소설 <체벤구르>에 표현된 자살적 유토피아에 대한 은유의 서곡으로 기능하는 한 민족의 혁명정신에 대한 담론이 암시된다. 이 극이 물 위에 부유하는 최근의 무대걸작품이라면, 체홉의 <제목없는 희곡>은 도진에 의해서 20세기를 관통하는 무용으로 번역되었다. 이와 반대로 <가우데아무스>의 무대는 하얗게 눈으로 덮여 있다. 이 작품은 상트 페테르부르크 국립 연극 아카데미 학생들과 만든 최초의 작품이다. 러시아의 군인훈련을 풍자한 이 극은 유감스럽게도 오늘의 러시아에도 적용되는 시의성을 갖추고 있어서 이 극단이 현대인에 초점을 맞추어 전세계의 관객들에게 제공하는 레퍼토리의 한 부분을 이루며 우리에게 연극의 필요성을 회복시켜준다.
이 심사평에도 간접적으로 언급되어 있지만 도진의 연극은 현대연극이 잃어버린 중요한 기능을 복원시켰다. 즉 감동이다. 현대연극, 특히 서구의 연극은 이성에 대해 회의하기 시작하면서 그 중추매개인 언어의 기능과 역할을 크게 축소시켜 왔고, 그 결과 지금은 극적 행동을 모방하는 정서적 내러티브 드라마보다 인간존재의 절망적 상황을 시적 이미지로 형상화하는 영리한 드라마가 범람한다. 배우와 관객이 같은 시간과 공간 안에서 경험을 공유하는 대신, 이제 관객들은 무대 위에 펼쳐지는 명석한 풍자시들을 감상하며 감탄할 뿐이다. 감탄은 있지만 감동이 없는 연극, 그것이 현대연극의 중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다. 그런데 도진의 연극은 감동을 생산한다. 연극이 원래 갖고 있었던 본질적 기능을 회복시켜줌으로써 그는 우리에게 새롭게 느껴진다. 현대연극의 역설이고 도진의 이유 있는 반항이다.
도진의 연극이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첫째 이유는 스토리텔링 때문이다. 앞의 심사평에서도 소개가 됐지만 그는 러시아의 위대한 소설들을 각색해서 무대화한다. 이는 타오미나의 콜로키엄에 참여한 러시아의 한 극작가가 증언한 대로, 러시아에서 아직 작가의 저작권이 보장되지 않기 때문에 극작이 부진한 것과 무관하지 않다. 그래서 그는 도스토예프스키, 플라토노프, 아브라코프, 칼레딘 등의 고전이나 현대소설을 각색하는 것이다. 다행이 이 소설들은 흥미진진한 서술구조를 갖고 있고 현재의 러시아 뿐만 아니라 그 국경 너머까지 공감되는 보편적 시의성도 지닌다. 우리의 삶과 크게 다르지 않은 이야기들이 아직은 우리가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소통수단인 언어와 연극적 행동의 모방을 통해서 새로운 경험으로 체험될 때 감동이라고 하는 정서적 인식이 이루어질 가능성이 가장 높다.
도진의 연극이 감동적인 또 하나의 이유는 그의 무대 만들기 때문이다. 시카고 선 타임즈의 연극평론가의 관찰은 참으로 적절하다. “훌륭한 작품을 선보이는 극단은 세상에 많이 있다. 그러나 무대 위에서 펼쳐지는 삶을 실제로 믿게 만드는 극단은 드물다." 나 역시 <집>을 보고 그와 똑같은 느낌에 전율했었다. 이 극은 전쟁 때문에 어린 시절부터 마을의 유일한 남자로서 마을과 가정의 가장역할을 해야 했던 미하일이라고 하는 인물과 그의 누이동생 리자의 의절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끌어가면서, 공산당이 마을 사람들의 의식에 미친 영향, 그러니까 땅을 적절히 경작하기보다 당의 명령을 지키는 것을 우선시하는 피동화된 의식구조, 물질주의적으로 변화하는 도시와 변하지 않는 시골의 문화적 윤리적 갈등, 젊은 세대들의 방향상실과 성적 난잡 등을 소재로 ‘인생은 결국 고독한 것’이라는 주제를 형상화한다. 세계 어느 국가, 어느 마을에서도 있을 것 같은 이 평범한 이야기를 연출자 도진은 30명이 넘는 배우들로부터 완벽한 성격창조와 놀라운 앙상블을 추출해냄으로써 관객들에게 감동적인 체험을 안겨주었다. 피터 브룩도 도진의 말리극장을 일컬어 “유럽에서 가장 뛰어난 앙상블을 선보이는 극단”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배우가 관객의 주목을 끌기 위해서 극적 진실을 벗어나는 것을 가장 혐오했던, 그래서 배우들이 각자의 강한 목표를 추구하면서 관객을 잊고 서로에게 전적으로 집중할 것을 요구하는 스타니슬라브스키의 전통은 한 세대를 건너뛴 도진에 의해서 완벽하게 실현되었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스타니슬라브스키의 주문대로 도진은 이 위대한 할아버지 세대의 스승의 가르침을 자기 세대의 표현미학으로 번역했다. 나는 그의 <집>을 보고 체험한 미학적ㆍ정서적ㆍ연극적 감동을 <한국연극>이라는 잡지에 이렇게 증언한 바 있다.
무대를 가로지르는 네 개의 그네와 프로시니엄 문 두 개, 후미의 문 하나가 전부인 미니멀리스틱한 무대장치를 이용해서 너무나 풍요로운 인간풍경을 진실 충만하게 창조해낸 그의 연출력은 아무리 의식이 앞서간다는 유럽의 연극인들에게도 엄청난 감동을 안겨줄 수 있었던 것이다. 도진은 거의 모든 장면에서 배우들을 서로 쳐다보게 하는 대신 관객을 향해 정면으로 서거나 앉게 했다. 그러나 이 반사실적인 블로킹도 인물과 인물 사이의 유기적인 상호작용을 표현하는 데 전혀 방해가 되지 않았다. 현대적 시각화의 개념을 살리면서 스타니슬라브스키의 정수를 실현하는 도진의 경이로운 업적이다. 나는 이 첨단의 시대에도 전통적인 스토리텔링의 연극이 진정한 감동을 생산할 수 있다는 점을 반갑게 확인했다.
전통적 스토리텔링과 현대적 무대 만들기를 결합한 그의 연극은 ‘영리함’의 딜레마에 처한 현대연극의 엘리트주의를 타파할 훌륭한 대안이 될 수 있다. 즉, 연극의 인문주의를 회복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는 말이다. 나는 대동제로서의 연극, 직접경험으로서의 연극, 이성과 감성이 총동원되는 전존재적 경험으로서의 연극, 인식적ㆍ정서적ㆍ미학적 감동 생산자로서의 연극이 거기서 소생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나는 도진의 진지한 연극관을 매우 긍정한다. 그는 모스크바 타임즈 2000년 7월 1일자 인터뷰에서 존 프리드만에게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우리 모두는 인간영혼의 언어를 공유한다. 연극은 인간영혼의, 인간신경의 언어이다. 어느 정도까지는 이것이 우리의 사명이다. 왜냐하면 연극은 특정한 인간의 편견들을 깨뜨리는 능력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연극의 가능성은 우리가 보통 실감하는 것보다 훨씬 크다. 우리는 연극을 쇼 비즈니스나 오락으로 축소하거나, 혹은 지식인들을 위한 지루한 지적 활동으로 만들고 있다. 내가 보는 바로는 진정한 연극은 이 모든 것을 수용하면서도 열정을 자극하고 고무하는 연극의 주된 사명을 달성할 수 있다. 오늘날의 우리는 걱정과 불안과 조급함으로 인해 이러한 것들을 체험하기가 좀처럼 힘들다. 우리에게는 열정을 위한 에너지와 시간이 없다. 그러나 인간은 열정을 빼앗기면 병들어 버리고 만다.”
도진의 연극관과 연극방법론, 연극교육관을 아우른 <가우데아무스>는 프랑스, 이탈리아, 영국 등지에서 여러 상을 수상한 말리극장의 대표적인 레퍼토리다. 제자들을 극단에 수용하여 동일한 연극문법과 합의된 연극정신으로 연극을 만드는 도진의 연극방법론은 그러지 못하는 우리의 연극교육과 연극제작의 관행에 새로운 자극과 깨달음, 그리고 방법론을 제공해줄 것으로 믿어져 기대가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