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리퍼처럼 편한 것도 없습니다.
질질 끌고 다니는 것이
영 내가 살고 있는 삶 같아서
날 떠받치다 말 운명을 알고 있기나 한 듯
다리를 꼬고 앉을 때는
꼭 뒤꿈치에 틈이 생깁니다.
발목을 까딱거리며
그 간격만큼 방정을 떨어보지만
어디 만만한 것이 슬리퍼뿐이겠습니까?
왜 나는 화장실에 앉아 생각없이
문에다 대고 세마치 장단을 두드려 보는지,
이를 닦다가도 왜 거울 속 사내를 노려보는지,
왜 가끔씩 귀신 꿈 대신 UFO꿈만 꾸는지,
한때 슬리퍼가 하루종일 나를 데리고 다녔던 시절에도
나에게는 천국이 없었습니다.
"오빠 운동화는 더럽고 냄새난단 말야!"
"미안해..꼭 3등해서 운동화상품탈께..그때까지만 이거 같이 신자"
알리. 그 녀석의 눈빛.
아, 슬리퍼는 슬리퍼일 뿐인데
왜 질질 끌고 다녀야만 내 것일 것 같은.
하루종일 무언가에 끌려
사무실 일을 마치다보면 문득,
헤진 슬리퍼 하나 벗어 놓은 일이
어쩌면 내 삶의 화두가 아닐까.
신기도 편하여
벗기도 편한 이승의 삶이 아닐까.
나는 내내 슬리퍼처럼
퍼지고 슬퍼져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