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을 읽다가 하루키를 떠올렸습니다.
하루키의 글이 윤성택님께 그러했듯이 이 글이 제 눈을 통해 심장속으로 꾸역꾸역 흘러들어오더군요.
해바라기와 채송화, 혹은 담쟁이......
황경신
어느 날 깊은 밤에 그녀가 내게 전화를 했다. 잠에서 깨어나지 못한 채 수화기
를 집어들고 잠에서 깨어나지 못한 채 그녀임을 확인하고 꿈속에서 들려오는
듯한 그녀의 목소리를 들었다. "나, 다른 사랑에 빠졌어." 그녀는 아주 먼 꿈
속 어디에선가 들려오는 듯한 느낌의 긴 한숨을 한번 뱉고서 툭, 하고 전화를
끊었다. 나는 잠시 멍하니 그녀의 말과 그녀의 한숨을 생각해보았다. 잠에서
깨어나지 못한 나는, 현실 속의 이 세계와 꿈속의 저 세계 사이 어디엔가에 얹
혀서 떠돌고 있었다. 별다른 의미 없이, 나는 깊은 한숨을 한번 쉬고 다시 이
불 속으로 기어들었다. 이 글은, 다른 사랑에 빠진 그녀와, 아직 그녀를 사랑
하고 있는 나 사이, 이미 떠나가버린 그녀가 있는 이 세계와, 아직 떠나지 않
은 그녀가 있는 저 세계 사이에 대한 이야기이다.
다른 사람들이 몇 가지의 세계 속에서 살아가는지에 대해서는, 나는 아는 것이
없다. 내가 아는 것은, 내가 세 가지의 세계 속에서 살고 있다는 것이다. 사람
들이 알아 듣기 쉽도록 설명을 하자면, 우선 '눈으로 보는 것만 겨우 믿어가며
근근이 살아갈 수 있게' 만들어진 '이 세계' 하나, 그리고 이 세계 사람들에게
설명하기에는 너무나 복잡한 '저 세계' 하나이다. 이렇게 놓고 보면 세 가지가
아니고 두 가지인 것 같지만, '이 세계'와 '저 세계'의 사이에 존재하는 또 하
나의 세계가 있다. 아주 골치 아픈 세계가. 나는 그 '사이 세계'에서 그녀를
만났다.
그녀는 전화선을 통하여 나에게 왔다. 정확히 말하자면, '저 세계'에 속해 있
는 나에게 '이 세계'를 상기시키려고 하는 누군가의 음모에 의해 그녀는 나에
게 전화를 걸게 되었다. 그녀는 하얀 바이러스 같은 모습을 하고 뾰족한 창으
로 나의 귀를 콕콕 찍어댔다. 그리고 무턱대고 나에게 이야기를 하라고 졸라대
기 시작했다. 꿈속에서 나와 놀아주던 하얀 토끼들이 그녀의 뾰족한 창을 보고
달아나버렸다. 그래서 나는 투덜거렸다.
"파드락, 파드락, 삐빙 아알……"
"토끼말 같은 거 하지 마."
그녀가 단번에 내 말을 잘랐다.
"제발 토끼말은 하지 마. 그냥 담쟁이 덩굴과 채송화 얘기나 해줘."
나는 정신이 들었다. 전화선을 타고 나에게 온 것은 토끼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건 해바라기와 채송화 얘기가 아니었어?"
"어쨌든 상관없어. 어차피 이렇게 된 거."
"뭐가 어떻게 되었는데?"
"지긋지긋해. 그것보다 달팽이 얘기나 해봐. 아니, 그 전에 왜 토끼꿈이나 꾸
고 있는지 말해봐."
어째서 나는 토끼꿈 같은 걸 꾸고 있었을까.
"너, <토끼 요법>으로 잠들었지? 아직도 그게 듣니?"
그랬다. 내가 그날 밤 잠들기 전에 사용한 것이 <토끼 요법>이었다. 푸른 들판
을 상상하고, 들판과 하늘이 맞닿은 지평선을 상상하고, 지평선 너머로부터 토
끼가 한 마리씩 뛰어오는 것을 상상한다. 열 마리 정도의 토끼가 내게 뛰어왔
을 때, 나는 가볍게 이 세계의 선을 넘어 저 세계로 갔던 것이다.
"난, 토끼 오백 마리로도 잠이 안 들어."
"그럼 <조각배 요법>을 써봐." 내가 말했다.
"푸른 바다를 상상하고, 바다와 하늘이 맞닿은 수평선을 상상하고, 수평선 너
머로부터 조각배가 하나씩 노저어 오는 걸 상상한다? 소용없어."
"조각배에 하얀 돛이 있어?"
"돛?"
"그게 가장 중요해. 돛이 없는 조각배 같은 건 소용없어."
"설마……"
"해봐. 삼각형 모양의 하얀색 돛이야."
툭. 전화가 끊어졌다. 당장 해보려나 보다. 나는 다시 잠을 청했다. 푸른 수평
선 너머로 하얀 돛을 단 조각배가 하나, 둘, 셋, 넷, 다섯……. 그리고 나는
다시 저 세계의 바닷가에 서 있었다.
마침 저녁 무렵이었다. 노을이 한없이 아름답게 내려앉고 있었다. 북한강 언저
리마다 잔잔한 바람들이 꼬리를 흔들며 찰랑찰랑, 거품을 만들어냈다. 나는 강
을 따라 걸었다. Midnight Oil의 가 듣고 싶었다. 멜로디를
기억하려고 애쓰다가 작은 나무 하나와 부딪힐 뻔했다. 강물 위로 드리워진 작
은 가지 하나에 가만히 앉아 있던 새 한 마리가 나를 힐끗 바라보았다. 그리고
푸드덕 날아오르더니 다음 순간 곧장 강물을 향해 하강했다. 파르르, 하얀 깃
털에 묻은 푸른 물방울을 털어내는 새의 입에 못 하나가 물려 있었다. 새는 작
정이라도 한 듯 내 발 밑에 못을 툭, 떨어뜨리고 어디론가 날아가버렸다. 나는
못을 차마 집어들지 못하고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찰랑찰랑, 물결이 일더니 스
스스, 물가로 또 하나의 못을 밀어내었다. 두 개의 못은 서로 만나서 기쁘다는
듯이 몸을 부딪치며 소리를 냈다. 까득까득, 창창거렸다. 그러더니 이번엔 가
당찮게도 종소리 같은 걸 내기 시작했다. 뎅, 뎅, 뎅, 땡그랑, 땡그랑, 짱그
랑, 짱그랑……
"못이 있었어……"
전화선을 통하여 음속으로 나에게 달려온 그녀가 풀이 죽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두 개였어." 나는 아는 척을 했다.
"그런데 굉장한 초록색이었어. 빨려들어갈 것 같았어. 그런데 물방울들이 있었
어. 초조해 보였어. 나에게 답을 말하라는 거야."
"종소리를 내면서?"
"아이 참, 소리 같은 건 내지 않았어. 차라리 소리를 냈으면 좋았을 텐데. 그
럼 안심이 될 텐데."
"두 개의 못이 부딪히면 소리가 나는 거야."
"두 개의 못? 못은 하나밖에 없었어. 지독하게 푸르고 깊고……"
"뭐야, 연못이란 말야?"
"뭘 들은 거야, 연못 따위가 아니야. 그거보다 더 깊고 푸르다구. 못이야, 그
냥 못."
"……"
"그런데 달팽이와 해바라기 이야기는 안 해줄 거야?"
"해바라기와 채송화야."
"아아…… 그래. 상관없어. 그런데 그 하얀 돛 말이야……"
"으응, 삼각형 모양의?"
"너무 지겨워. 게다가 꿈은 너무 기하학적이야."
나는 사랑을 너무 많이 한 사람 중의 하나이다. 당신도 알겠지만, 사랑은 혼자
기를 쓴다고 되는 게 아니다. 어디까지나 대상이 있어야 한다. 사람들은 눈을
씻고 보아도 그 대상이라는 걸 찾기가 하늘의 별 따기라고 하지만, 어째서 그
런지 나는 알 수가 없다. 언제 어느 자리에서든, 어떤 상황에서든 나는 사랑에
빠질 대상을 발견하고야 만다. 눈을 감고 있어도 고개를 돌리고 있어도 그렇게
되어버린다. 그 다음에는 참으로 한심하다. 세상에는 두 종류의 여자밖에 없
다. 평범한 여자, 그리고 특별한 척하지만 사실은 평범한 여자.
평범하기 짝이 없는 여자들의 장단을 맞추어주는 일도 짜증나지만, 특별한 척
하는 여자들을 부추겨주는 일은 더욱 짜증스럽다. 하지만 사랑에 빠진 그녀들
은 내가 내는 짜증조차 사랑이리라 생각한다. 때로 나도 짜증낼 사람이 필요하
기 때문에, 바람 빠진 풍선 같은 세상에서 나는 풍선껌을 씹듯 그녀들을 만나
고 헤어진다. 이번엔 좀 특별한가, 하고 만났다가 진저리를 치고 헤어진다. 사
람들은 만나는 일보다 헤어지는 일이 더 어렵다고들 하지만, 사실 요령만 알면
간단하다. 헤어진다는 것이 얼마나 멋있는 일인지, 몇 마디만 해주면 그녀들은
금방 포기한다. 그녀들로서도 나를 사랑하지 않은 것이다. 짧고 격정적인 키스
가 끝나고, 눈물이 글썽한 그녀들이 마지못해 돌아서는 모습을 지켜보고, 나는
휘파람을 불며 집으로 돌아와 Midnight Oil의 를 들었다.
"세상엔 두 종류의 남자밖에 없어. 평범한 남자 아니면 특별한 척하지만 사실
은 평범한 남자." 그녀가 말했다.
"혹은 여자." 나는 아는 척했다.
"평범한 남자들의 장단을 맞추는 것도 짜증나지만……"
"특별한 척하는 여자들을 부추겨주는 일은 더 짜증나지."
"그러는 넌 특별하니?"
"그러는 넌?"
"전혀, 난 평범하기 짝이 없는 여자야."
"마찬가지야."
"남자들은 뭔가 특별한 걸 요구해."
"머릿속에 그림을 그리지."
"맞춰주는 건 쉬워."
"쉽지."
"그뿐이야."
"쉬운 일도 하기 싫을 때가 있지."
"거지 같애."
"엿 같지."
같은 순간, 우리는 같은 생각을 했다. 그리고 전화는 툭, 끊어졌다.
그날, 나는 <나뭇잎 요법>으로 잠을 청했다. 나무 하나를 상상한다. 나뭇가지
마다 무성한 잎들이 매달려 있다. 잎이 떨어진다. 하나…… 집중이 되지 않았
다. 나무가 있다. 오케이. (그런데 그 나무는 왼쪽으로 약간 휘어져 있다.) 나
뭇가지에 잎들이 매달려 있다. 오케이. 그 중에서 하나의 잎이 떨어진다. 떨어
진다…… 오……케이. 땅으로, 땅으로…… 땅은 어디 있지?
그녀가 생각났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BECK의 앨범을 걸고 전
화기를 노려보았다. 수화기를 들어보고 전화 코드가 잘 꽂혀 있는지 확인했다.
그리고 다시 전화기를 노려보았다. 수화기를 들어보고 전화 코드를 확인했다.
다시 전화기를 노려보았다. 그리고 '해바라기와 채송화' 얘기를 생각해보았다.
그녀가 물어올 경우 대답할 수 있도록.
이 세계에서 더 이상 상상력은 없다. 우리는 지구 위의 모든 땅과 바다, 지구
밖의 모든 별과 별이 아닌 무한의 우주공간을 빼앗겼다. 나는 꿈에 집착한다.
집착하고 집착한다. 꿈이 무엇을 해줄 수 있는가, 하고 당신은 묻는가. 꿈은
아무것도 해주는 것이 없다. 그것 때문에 나는 꿈에 집착한다. 상상력이란 그
런 것이다.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것이다. 판타지와 SF는 사라졌다. 동화도
사라졌다. 왜 사라졌는가, 하고 당신은 묻는가. 우리가 비밀을 지키지 못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것들을 글로 쓰고 노래로 부르고 영화로 만들고 그림으로
그렸기 때문이다. 거기에 대해 우쭐거렸기 때문이다. 작은 요정들은 그들의 모
조품이 세상에 태어난 순간 물거품이 되어 사라져갔다. 마녀들은 저주를 퍼부
으며 호리병 속으로 들어갔다. 그들은 지구의 중심 혹은 다른 행성의 중심에
묻혀졌다. 이제 아무도 그들을 볼 수 없을 것이다. 다시는 세상이 마법에 걸리
지 않을 것이다.
"그건 였어."
" 다음에 나오는 곡이지."
"나는 떨어지고 있었어. 63빌딩 아이맥스 영화관에서 본 <그랜드 캐년> 같은
곳이었어."
"알 만해."
"무섭진 않았어. 떨어지면서 다른 생각을 했으니까."
"Whiskeyclone, Hotel City?"
"오케이."
세상에는 세 종류의 여자가 있다. 평범한 여자, 특별한 척하지만 사실은 평범
한 여자, 그리고……
"그냥 주파수가 맞는 거야."
"제발, 세계 각국으로 번역판이 팔려나가는 일본 대중작가 같은 소리만 하지
마." 그녀가 주의를 주었다.
"오케이. 그래도 넌 좀 다르잖아, 안 그래?" 나는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물었
다.
"제발, 미국 대중작가의 번역소설 같은 문체만 쓰지 마." 그녀가 키득거렸다.
"그래, 난 통속적이야."
"지나치게 부르주아적이지."
"가볍고 진부해."
"혐오스러워."
"상상력을 발휘해봐."
"그러지. 무슨 꽃을 좋아해?"
툭, 내가 대답하기 전에 전화는 끊어졌다. 통속적이고 부르주아적이며 가볍고
진부한 나는 그녀의 전화번호를, 그녀의 이름을, 그녀의 나이를, 그녀의 몸무
게를, 그녀의 신발 사이즈를 알고 싶었다. 그녀는 그런 나를 혐오스러워할 것
이다.
"제목은 이거야, <동물원에 갔었지>." 그녀가 말했다.
"알았어." 나는 대답했다.
"동물원에 갔었지. 코끼리들은 당근을 먹고 독수리는 좁은 우리 안에서 푸드
득, 날아보다가 날카로운 눈빛으로 나를 쏘아보았지. 침팬지는 어린 아기 침팬
지에게 젖을 먹이고 곤충들은 배춧잎 위에서 부화를 하고 있었지. 늑대들의 선
한 눈빛, 지친 듯한 호랑이의 움직임, 우울해 보이는 고릴라의 표정에 가슴이
서늘해졌지.
바람 부는 3월의 동물원. 사람들은 원숭이들에게 먹을 것을 던져주었지. 북극
곰들은 얌전히 앉아 사람들이 던져주는 과자 부스러기를 받아먹고 있었지. 식
물원에서는 선인장들이 자라고 있었고 하마와 거북이는 미동도 없이 엎어져 있
었지.
기린들은 마치 먼 나라에서 온 듯 천천히 걸어다녔어. 그들을 쳐다볼 때면 언
제나 눈앞에 희미한 필터가 하나 드리워져 있는 듯 느껴졌지. 마치 이 세상 아
닌 곳에서 살고 있는 것들을 보는 것처럼. 날은 차갑고, 동물들은 우리에 들어
가 있었어. 곰들은 겨울잠을 자지 않았고 여우는 대낮인데도 일어나 있었지.
그들은 밤에 잠을 자는 걸까? 사냥을 하러 다니는 대신.
저 우리에 갇혀 있는 것이 나라면, 하는 생각을 했어. 만약 그렇다면 아무도
없는 밤중에 매일매일 연습해서 우리를 빠져나갈 수도 있을 텐데, 하고. 인간
의 눈에 우리는 허술해 보였고 인간의 생각에 갇혀 있는 건 재미없을 것 같아
서. 그리고 그런 생각도 했었지. 그들은 이미 바깥 세상에 나가보았을지도 모
른다고. 깊은 밤중에 몰래 우리를 빠져나와 다른 곳들을 헤매어보았을지도 모
른다고. 하지만 어디서도 살 수가 없어 모든 걸 포기한 채 다시 동물원으로 돌
아온 것인지도 모른다고.
그랬을 거야. 내가 그들이었다면, 이 도시 어느 거리에서 지친 걸음을 멈추어
야 하는지 몰랐을 거야. 달리는 차들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동물로 보였을
거야. 딱딱한 아스팔트, 어지러운 불빛이 너무 버거웠을 거야. 그나마 먹고 잘
수 있는 작은 우리가 그리워졌을 거야. 그들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을 거
야. 아무리 향수가 깊어져도 혼자서 아프리카까지 갈 수는 없으니까.
그러나 호랑이들은? 하룻밤에 천리를 갈 수 있다는 호랑이는 한달음에 백두산
까지 갈 수도 있지 않을까. 그들이라도 한 번씩 동물원을 탈출해주면 좋겠어.
어느 날 갑자기 호랑이 우리가 텅텅 비고, 사람들이 그들을 가두어놓을 수 없
다는 사실을 깨달았으면 좋겠어. 호랑이를 더 이상 볼 수 없다는 것이 안타깝
긴 하지만, 그러나 슬픈 호랑이들을 보고 싶지 않아.
너를 더 이상 볼 수 없다는 건 슬픈 일이지만, 그러나 슬픈 너를 보고 싶지는
않아."
"좋아, 내 차례야. 제목은 <우리는 커다란 매트리스 위에서 긴 키스를 나누다
문득 사랑에 빠졌다>"
"알았어." 그녀가 말했다.
"사랑은 처음에 나의 오른쪽 가운뎃손가락 끝에서부터 왔다. 손가락은 수줍게
얼굴을 붉히며 내게 말했다. "난 사랑에 빠진 것 같아." 그러자 나의 왼쪽 손
가락들이 고통을 호소해왔다. "어쩌지? 잠시 후에 나도 사랑에 빠질 것만 같
아." 그런 식으로 천천히 나의 몸이 사랑에 빠져드는 동안 나의 입술은 아무
말도 없었다. 그는 키스를 하느라 미처 사랑에 빠질 틈이 없었다. 결국 입술은
나의 몸 중에서 가장 마지막으로 사랑에 빠졌다.
나의 몸은 달짝지근한 열로 들떠 있었다. 이제 입술은 당황하여 살짝 벌어진
채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나의 손가락들은 나의 젖은 머리카락을 쓰다듬었
다. 나의 발가락들은 어떤 리듬에 맞춰 까딱거리고, 나의 날갯죽지는 천천히
아려왔다. 참 오랜만에 느끼는 감정이야, 나의 심장이 말했다. 그동안 나는 점
점 메말라가고 있었지. 이제야 살 것 같군. 그러자 나의 뇌가 말했다. 오래도
록 난 평온했어. 도대체 왜 또다시 이런 어리석은 짓을 벌이는 거야. 둘은 잠
시 다투다가 지쳐 잠에 빠졌다.
누가 나의 긴 잠을 지키고 있다. 그가 나의 꿈을 보고 있다. 네루다. 문득 나
의 혀가 이렇게 발음했다. 이건 네루다 식이군. 이제 아무도 네루다처럼 시를
쓰지 않아. 나의 꿈들은 잊혀졌다. 하룻밤 잠시 지상에 머물렀다 서둘러 떠나
가는 어린 눈송이들처럼. 까마득한 곳에 꿈들이 있었다. 그녀가 말했다. "이
런, 이건 나에 관한 꿈이군."
처음에 나는 커다란 매트리스 위에서 긴 키스를 나누고 있었다. 사랑은 나중에
왔다. 키스를 나누는 중간에, 혹은 키스가 끝난 후에."
"좋아, 그럼 안녕."
툭, 하고 전화가 끊어지기 전에 그녀가 '안녕'이라고 말한 것은 처음이었다.
그래서 나는 당황했다. 좋은 징조는 아니다.
사랑을 받는 일은 달콤하다. 달콤한 것은 좋은 것인가? 나는 선천적으로 단 걸
싫어하는 사람이다. 그녀가 나를 사랑하게 되지 않기를.
그녀는 울고 있었다. 어느 정도 울고 나서 그녀가 말했다.
"그녀는 짙은 남빛 교복을 입고 있었고 목덜미까지 내려오는 단정한 단발머리
에다 눈부시게 하얀 피부를 가지고 있었어. 그녀는 나를 너무나 애처로운 눈빛
으로 오랫동안 바라보았어. 왜 그러냐고 물었지만 그녀가 나에게 속시원히 말
해준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었어. 불분명한 그녀의 말을 종합하자면 그녀는 나
의 꿈 속의 꿈에 세 번쯤 나타났다는 거야. 내가 그녀를 본 적이 없다고 하자
그녀는 '네가 기억하지 못하기 때문에 나를 볼 수가 없었어'라고 말했어. 이제
야 내가 어렴풋이라도 그녀의 존재를 기억하고 인정했기 때문에 자신의 모습을
드러낼 수 있었다는 것이었어. 그러나 그녀는 여전히 슬픈 얼굴로 나에게 가까
이 오려고 하지 않았어. 내가 저를 아직 기억하지 못한다면서."
"정말 기억나지 않았어?" 나는 목소리에 최대한 위로의 마음을 담으려고 애쓰
며 말했다.
"그건 사실이었어. 나는 기억나지 않았지만 그녀가 거짓말을 한다고는 전혀 생
각되지 않았기 때문에 가슴이 아팠어. 그러나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어.
그녀는 떠나면서 나에게 이름을 가르쳐주었어. 해은이라고 했어. 내 기억이 살
아나면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라며."
"그래서……?"
"난 깨어났어. 여전히 가슴이 아팠고 그녀를 떠올리려고 애를 써보았어. 그러
나 소용이 없었어. 나는 정말 그녀를 몰라. 그녀를 알지 못한다는 것이 그렇게
슬플 수가 없었어. 내 기억에 사각지대가 존재하는 건 아닐까? 그녀를 다시 만
난다 해도 내가 그녀를 기억해내기 전까지 우리는 친구가 될 수 없다고, 그녀
가 말했어. 그렇다면 나에게는 희망이 없어. 그녀를 볼 수는 있겠지만 그녀를
만날 수는 없을 거야."
그녀의 꿈 속의 그녀. 내 꿈 속의 그녀의 꿈 속의 그녀. 혹은 그녀의 꿈 속의
내 꿈 속의 그녀. 나는 어렴풋이 기억이 날 것 같았다. 짙은 남빛 교복을 입고
목덜미까지 내려오는 단정한 단발머리에다 눈부시게 하얀 피부를 가지고 있던
그녀.
아무도 없는 토요일이었다. 텅 빈 거리에 바람만 불었다. 나는 지친 팔과 다리
를 딱딱한 나무의자에 놓고 King Crimson의 < I Talk To The Wind >를 들었다.
데킬라를 마시고 싶었지만 너무 한낮이었다. 나는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듯
했다. 그게 누군지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다시 Pink
Floyd의 를 들었다.
예전에 내가 만나던 여자아이 하나는 어느 날 갑자기 당돌한 눈빛으로 나를 착
째려보더니 "난 널 다 알아" 라고 말했다. 그래서 나는 그 아이에게 굉장히 잔
인한 말들을 퍼부어주었다. 그러자 그애는 울면서 가버렸다. 그러니 그애는 나
를 다 알지 못했던 거다.
또 어떤 아이는 하루종일 나를 졸졸 쫓아다녔다. 밥을 먹을 때도 버스 안에서
도 영화를 볼 때도 심지어 그녀가 몰고 다니던 빨간 프라이드를 운전할 때도
나만 쳐다보는 것이었다. 어느 날 그애의 친구를 만났는데, 우리는 셋이서 아
주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그날 밤, 그녀는 전화로 나에게 말했다. "네가 그렇
게 웃는 걸 굉장히 오랜만에 본 것 같애." 그리고 우리는 헤어졌다. 물론 그애
도, 그애의 친구도 나는 두번 다시 만나지 않았다.
나는 그런 쓰잘데없는 기억들을 떠올리며 지치고 딱딱한 카페에 앉아, Nina
Simone이 부르는 을 들었다. 텅
빈 토요일이었다.
"꿈이란," 그녀가 말했다.
"일종의 보상 같은 거야."
"현실에서 이루지 못한 것에 대한 보상." 내가 말했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이 현실에서 이루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몰라."
"이루지 못한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그런데 난 무얼 이루고 싶은 걸까?"
"어떤 꿈을 꾸는데?"
"물에 관한 꿈. 집에 관한 꿈."
"넌 현실주의자가 되고 싶은 거군."
"그럴 수 있다면." 그녀는 쉽게 긍정했다.
"넌 어떤 남자가 좋아?" 통속적인 내가 물었다.
"지적인 남자." 지적인 그녀가 대답했다.
"흠. 그럼 문제는 뭐야?" 진부한 내가 물었다.
"문제는," 그녀는 한숨을 가볍게 내쉬었다.
"모든 지적인 남자들은 통속적인 여자를 좋아한다는 거지." 통속적이지 않은
그녀가 말했다.
"그녀들은 진한 립스틱을 바르고 볼륨 있는 몸매를 드러낸 옷을 입고서 부드러
운 몸짓으로 남자를 유혹해. 거기에 비해 나는? 전혀 그렇지 못해. 그러니 내
가 지적인 남자를 갖지 못하는 건 당연한 일이 아닐까? 내가 그들의 세속적인
면까지를 사랑할 수 없는 건 당연하지 않을까?"
"세속적이지 않은 남자를 찾아봐." 내가 충고했다. "아니면 너 스스로 세속적
이 되든지."
"게다가 나는 똑똑해." 그녀는 덧붙였다.
"남자들은 '똑똑하지만 멍청한 여자'를 고르거든. 현명함에 대해 충분히 경의
를 표한 다음 바보 같은 여자들을 사랑하지."
"맞는 말이야." 나는 인정했다.
"세상에 대해 똑똑한 건 상관없지만 자신에게만은 백치 같은 면을 드러내었으
면, 하지."
"그렇게 해주는 건 쉬워. 역겨워서 그렇지."
"누구한테?" 나는 집착했다.
"나한테." 툭, 전화는 끊어졌다.
며칠째 전화가 오지 않았다. 매일밤 자리에 누워서 나는 수많은 별들이 떠 있
는 까만 밤하늘을 상상했다. 별이 떨어지는 모습을 상상했다. 별이 떨어진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오백 개의 별이 떨어져도 나는 잠이 들지
않았다. 오백 개의 별들이 떨어지고 난 하늘은 캄캄했다. 나는 캄캄한 하늘 아
래 혼자 누워 있었다. 내 침대 언저리에 꿈들이 이리저리 뒤척이고 있었다. 그
녀에게 전화가 더 이상 오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깨달은 어느 날, 나는 전화
코드를 뽑아버리고 잠을 청했다. 이제 하늘에 남아 있는 단 하나의 별을 잔뜩
노려보면서. 한참 동안 그 별을 노려보고 있자니, 눈에서 말간 눈물이 흘렀다.
이 글은, 다른 사랑에 빠진 그녀와, 아직 그녀를 사랑하고 있는 나 사이, 이미
떠나가버린 그녀가 있는 이 세계와, 아직 떠나지 않은 그녀가 있는 저 세계 사
이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 글은 또한, 해바라기와 채송화에 관한 이야기이다. 달팽이에 관한 이야기이
다. 깊은 밤, 잠에서 깨어난 내가 울음 섞인 목소리로 전화를 걸 때, 해바라기
와 채송화 이야기로 나를 달래어주던 누군가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는 내가 더
이상 전화를 할 수 없는 세계로 떠났다. 그는 나에게 해바라기와 채송화와, 우
리가 종종 착각했던 달팽이와 담쟁이 덩굴까지 몽땅 맡기고 떠났다. 그가 떠난
이후로 몇 번인가, 나의 꿈은 나에게 전화를 했다. 이 글은, 더 이상 꿈을 꾸
지 못하는 나와, 나의 꿈, 그녀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리고……
오래 전, 햇살이 따사로운 어느 정원에 해바라기와 채송화가 살았다. 정원을
둘러싼 담장은 그리 높지 않아서, 해바라기는 항상 발돋움을 하여 바깥 세상을
구경하곤 했다. 그리고 자신의 발 밑에서 투덜거리는 채송화에게 바깥 세상 이
야기를 해주곤 했다. 채송화는 언제나 해바라기의 이야기를 들으며 바깥 세상
을 그리워했다. 해바라기의 눈이 아닌, 자신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싶었다. 채
송화는 해바라기에게, 죽기 전에 한 번이라도 스스로 바깥 세상을 보았으면 좋
겠다고 말했다. 해바라기는 채송화의 간절한 소원을 들어주고 싶었다. 그래서
자신의 몸을 타고 올라오라고 말했다. 채송화는……
"채송화가 어떻게 해바라기를 타고 올라가?" 나는 투덜거렸다.
"그럼, 담쟁이 덩굴이라고 하지 뭐."
"에이, 담쟁이 덩굴은 담을 타고 올라가면 되잖아. 뭐하러 해바라기에게 부탁
해?"
"그럼 달팽이라고 해." 그가 말했다. "그리고 이제 그만 자."
"으응…… 그런데 해바라기는 바깥 세상에서 무얼 본 거야?"
"물과…… 집들. 그곳에는 강이 흐르고 있었고, 낮은 담을 가진 집들이 있었
어. 이제 그만 자."
"그럼 채송화도 그것들을 봤어?"
"봤지. 맞은편 담장 너머에 해바라기를 타고 기어올라온 다른 채송화도 보았
지. 이제 그만 자."
나는 안심하고 잠이 들었다.
툭, 하고 전화가 끊어지는 소리를 그는 들었을 것이다. 나는 한번도 듣지 못했
다.
'이 세계'와 '저 세계'의 사이에 존재하는 또 하나의 세계가 있다. 아주 골치
아픈 세계가. 나는 그 '사이 세계'에서 그녀를 만났다. 그곳에 강이 흐르고 있
고, 낮은 담을 가진 집들이 있다. 해바라기와 채송화와 달팽이와 담쟁이 덩굴
이 담을 타고 기어오르고 있다. 다른 사랑에 빠진 그가 떠났다. 다른 사랑에
빠진 나의 꿈, 그녀도 떠났다. 그들은 지구의 중심 혹은 다른 행성의 중심에
묻혀졌다. 이제 아무도 그들을 볼 수 없을 것이다. 다시는 세상이 마법에 걸리
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