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숨 돌리셨나봅니다
항상 아침 저녁으로 둘러보고 갑니다 님께서 잠시 집을 비우셨구나 생각하다가 그래도 제 집인냥 한참을 들락거립니다 님의 말씀대로 정말이지 건강한 가을이 되시길 빕니다 오늘은 어떤 시를 마음에 새겨둘까 일을 잠시 멈추고 시집들을 들추어보는 아침입니다 제 손길에서 조금은 소외된 시집 하나를 꺼내봅니다 여기 남기고 가겠습니다
깨금발로 종종거리더라도 이렇게 살고싶은 이유가 눈부신 가을이었으면 합니다
[정철훈] 살고 싶은 아침
순이야, 스물아홉 네가
굵은 파를 다듬는구나
도마 위에서는 네 푸른 손이 듬성듬성 잘려도
아무런 생채기가 없어
문간방 쪽문을 열면
물발 센 사내처럼 차디찬 수돗물이
붉은 바가지를 돌리고
시금치를 무치는 네 손이 눈부시구나
나는 어느 양지바른 언덕 아래 대문도없는
오두막 툇마루에서 네가 차린 상를 받겠구나
무지렁이처럼 풋내 이는 맨살 붙이고
골 깊은 겨드랑이 간질이며
이 빠진 접시며 대접이며 누런 놋숟갈이래도
대야엔 아침 일찍 방을 훔친 걸레 하나
그렇게 우리의 죄를 닦고 닦아
순이야, 네 발가벗은 아랫도리 같은
스물아홉이 나의 전부였구나
마늘 다지는 도마 소리가 방안을 가득 채워
우리는 죽어서도 같이 살자꾸나
너는 지금 무순을 데치고 있다
혹 너는 봉지에 싸인 멸치를 보며
우리가 잃어버린 자유를 떠올리는지
문간방 쪽문 사이로 비껴간
스물아홉 순이의 아침처럼
나는 이 생을 깨금발로 종종거린다
정철훈시집/살고 싶은 아침/창작과 비평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