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도현님의 <아무것도 아닌 것에 대하여> 시집 중
*빗소리 듣는 동안
1970년대 편물점 단칸방에 누나들이 무릎 맞대고
밤새 가랑가랑 연애 얘기하는 것처럼
비가 오시네
나 혼자 잠든 척하면서 그 누나들의
치맛자락이 방바닥을 쓰는 소리까지 다 듣던 귀로, 나는
빗소리를 듣네
빗소리는
마당이 빗방울을 깨물어 먹는
소리
맛있게, 맛있게 양푼 밥을 누나들은 같이 비볐네
그때 분주히 숟가락이 그릇을 긁던 소리
빗소리
삶은 때로 머리채를 휘어잡히기도 하였으나
술상 두드리며 노래 부르는 시간보다
목 빼고 빗줄기처럼 우는 날이 많았으나
빗소리 듣는 동안
연못물은 젖이 불어
이 세상 들녘을 다 먹이고도 남았다네
미루나무 같은 내 장판지에도 그냥, 살이 올랐다네
-정호승님의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 시집 중
*인수봉
바라보지 않아도 바라보고
기다리지 않아도 기다리고
올라가지 않아도 올라가
만나지 않아도 만나고
내려가지 않아도 내려가고
무너지지 않아도 무너져
슬프지 아니하랴
슬프지 아니하랴
사람들은 사랑할 때
사랑을 모른다
사랑이 다 끝난 뒤에서야 문득
인수봉을 바라본다
*추억이 없다
나무에게는 무덤이 없다
바람에게는 무덤이 없다
깨꽃이 지고 메밀꽃이 져도
꽃들에게는 무덤이 없다
나에게는 추억이 없다
추억으로 걸어가던 들판이 없다
첫눈 오던 날 첫키스 나누던
그 집앞 골목길도 사라지고 없다
추억이 없으면 무덤도 없다
추억이 없으면 사랑도 없다
꽃샘바람 부는 이 봄 날에
꽃으로 피어나던 사람도 없다
*그런 생각이 드는군요.
시는 어디까지나 시라고,
현실이 될수 없는 거라고.
그래서 오늘을 삶니다.
그래서 오늘도 살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