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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월의 붉은 함성

2002.06.25 10:36

정성필 조회 수:250

대한민국이 싫을 때가 있었다. 길에서 광장에서 소금 땀을 흘리며, 눈물로 최루가루 뿌연 길바닥을 씻으며, 종로에서 광화문으로, 시청에서 명동성당까지 뛰어다니면 민주주의를 외치며, 온몸에 태극기를 감싸고 민주주의여 만세를 외쳤던 시절이 있었다. 그 시절이 지나자, 땀의 댓가로, 눈물로 이루어낸 정성으로 무언가 변할 줄 알았는데, 적은 뒤로 숨고, 동지는 배신하고, 바뀌어야할 것들은 옷만 갈아입고 버젓이 행세를 했다.

대한민국이 싫었다.
어디든 떠나고 싶었다.

서른 잔치는 끝나고 잔치의 뒷치닥거리에 남겨진 것은 패배와 절망이었다.

대학시절 세상은 더러운 돈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눈처럼 깨끗한 우정과 불의와 결코 타협할 수 없는 정의감으로 산다고 믿었다. 실망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새롭게 바뀌면 새로운 세상이 올 줄 알고 손가락마다 굳게 맹세했던 가락지를 뽑아주었다. 집집마다 소중하게 간직했던 금붙이를 꺼내 모았다. 세상이 바뀌면 이 나라가 좋은 나라가 될 걸로 믿었다. 이전의 모든 부정과 부패는 사라질 줄 알았다. 최소한 악법이라도 개선 될 줄 알았다. 실망하는데는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어디에도 변화는 없었다. 아는 놈들이 더 했다. 노동운동은 탄압 당하고 학생운동은 아는 분들이 더 교묘하게, 더 심하게 짓밟아 버렸다. 여전히 집들은 철거당하고 여전히 노점상은 좌판을 벌일 때마다 죄인이었다. 장애인들은 몸에 불을 사르며 장애우들의 처우개선을 부르짖었으나 듣는지 마는지 소리는 그들의 목소리는 사라지고 말았다. 인권위원회는 싸구려 면죄부를 발급하기에 바빴고, 아직도 씻어내지 못한 광주의 피는 노벨평화상 수상자답게 혼자 다 용서 해 버렸다.

누구도 용서하지 않았는데도 이미 전두환 일당에게 면죄부를 주며 구걸했지만 민심은 등을 돌렸고, 슬그머니 유신의 독재자를 동상으로 만들어 아부를 떨었지만 지방선거에서의 참패는 경상도부터 시작되었다. 대한민국이 싫었다. 정권이 바뀔 때 대한민국은 달라질 거라고 믿었다. 이젠 살맛 나는 세상이 올 거라고 믿었다. 이제 각자 삶의 자리에서 열심히 살아간다면 세상은 분명히 달라질 거라고 믿었다.

대한민국은 이제 세상에서 가장 모범적인 민주주의의 시스템을 이루며 발전할 것이라는 믿음이 깨지는데는 오랜 시간 걸리지 않았다.

정권을 바꾸기 위해서 광주에서 유월항쟁까지 17년을 시청 가득한 함성에서 정권교체까지 10년 동안 미문화원 방화에서 분신정국까지 몸을 불사르며 바꾸자고 했지만 결과는 언제나 도둑질 당했다. 아직도 미군의 으르렁거리는 전차의 캐터필러는 앳된 소녀를 깔아뭉개고 그들은 상수원에 독극물을 뿌려대는데도 우린 아뭇 소리 못하고 눈치만 보고 있었다. 정권이 바뀌면 무언가 변할 줄 알았다.

노근리의 학살은 영국의 BBC에서 전모를 밝혀 공개했는데도 아직도 우리 사회는 노근리의 문제가 "사실이다, 아니다"의 미궁에 빠져 있다. 여전히 그들은 우리의 땅이 매향리 같은 사격장일 뿐 아무 것도 아니었다. 변한 것은 없었다.

변한 것을 보고 싶었는데 변한 것은 없었다. 떠나고 싶었다. 아니 이젠 대한민국을 버리고 싶었다. 국적도 버리고, 대한민국을 깨끗이 잊고 싶었다. 내가 내는 세금이 공적자금으로 들어가 부패한 주머니나 채워주던 그 짓을 볼 수 없었다. 발전노조의 집단 행동은 철저하게 탄압하면서도 의사들의 파업은 속수무책으로 적극 반영해 의료수가만 높여 놓여 놓은 그들은 과거의 동지들이었다. 그들의 과거 경력으로 사회를 발전 시키는게 아니라, 정치적 야망을 채우는데 쓰여진다는 사실에 이 땅이 싫어 졌다. 떠나고 싶었다. 대한민국이 싫었다.

그러나,

2002년 6월에 보았다. 그들이 아닌 젊은이들이, 아니 고등학생들이, 길거리로 쏟아져 나온 엄청난 물결을 보았다. 세상을 바꾸자라고 외쳤던 세대는 신세대, X세대, N세대들을 보면서 혀를 찼다. 박노해씨가 감옥에서 나와 가장 먼저 신세대와 친해지려 과장된 몸짓을 했다. 그는 신세대가 세상을 변화시킬 거라 했다. 코웃음을 쳤다. 박노해의 옷매무시나 어설픈 랩 실력으로는 신세대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손가락을 휘둘렀다. 또 누군가는 우리 세대보다 이 세대가 더 세상을 변화시킬 거라 했다. 그러나 요즘 젊은것들. 머리 염색이나 하는 것들, 방 문화나 아는 것들 컴퓨터에서 자기만의 세상을 구축하는 그 놈들, 어른도 몰라보고 위아래도 없는 싸가지 없는 것들을 욕하기에 바빴다. 선거에도 참여하지 않는 그들 이젠 이 땅은 희망도 물 건너간다고 했다. 그러나 선거 불참이 또 하나의 집단행동이라는 것을 인식하지 못했다.

대학교의 대자보 수준은 땅바닥에 떨어졌고, 민중이나 노동자 투쟁과는 거리가 먼 그들에게 조국의 미래는 불투명해 보였다. 자기만 아는
것들, 머릿속에 든 것 하나 없는 것들, 이기주의자들. 그들을 정죄 하고 있던 우리는 이미 기성 세대가 되었다. 자기 반성이 없는 것이 더 무서운 것임을 깨닫지 못했다.

그러나 전환기는 왔다. 2002년 6월 전국을 물들인 붉은 물결.
난 알아요, 라고 외쳤던 신세대의 기수, 서태지의 랩보다도 더 열광적으로 대~한민국을 외치며 태극기를 몸에 두르고 나온 그들 속에서 누군가는 광기를 보았다 했다. 누군가는 맹목적 민족주의를 보았다 했다. 그러나 그들 속에 가득한 애국심이 87년 시청을 점거한 시민, 대학생과 다를 바 없다고 믿는 것은 아직도 대한민국에 대한 애정이 남아 있는 증거일 거다. 부자 아들이나, 가난한 민중의 딸이나, 경상도 사람이나 전라도 사람이나 이제 지역이나 신분은 모두 붉은 옷으로 하나가 되었다. 대학에서는 총장도 교수도 학생도 청소하는 용역 아줌마도 붉은 옷을 입고 함께 응원을 했다. 신분은 붉은 옷을 입는 순간 평등해졌다. 그 순간만큼은 지역이나 혈연 학연을 넘어선 신분을 계층을 넘어선 모두가 한 마음이었다.

버리고 싶었던 대한민국. 제 3국을 선택해 남도 북도 떠나 남의 땅에서 살기를 바랐던 전쟁 포로들, 이미 그 심정으로 조국을 버리고 싶었던, 우리는 2002년 광장에서 거리에서 이 땅을 붉게 물들인 사람들 가운데서 열정적인 에너지를 보았다. 뭉치는 힘을 보았다. 힘은 모아지기만 하면 발휘될 수 있다.

축구가 젊은 힘을 모아 놓았다. 이제 도저히 모일 수 없는 것처럼 보였던 흩어진 세대들이 모였다. 이전의 세대가 또 그이전의 세대도 이루어 놓지 못한 일 엄청난 집단을 지금의 세대는 이루어 놓았다. 월드컵세대. 이제 모인 그 힘이 올바르게 쓰여지게 해야한다. 대한민국을 연호하던 그 힘이 대한민국을 발전시키게 해야하고 그 힘으로 선배들이 또 윗 세대들이 이루어 놓지 못한 일을 하게 지지해주어야 한다. 이제 실패한 선배들의 방식을 강요하지 말고 그들의 방식을, 그들의 열정을 그들의 언어를 배워야한다. 이해하는 차원에서 이젠 뭉치는 그들의 방식을 배워야한다.

이제 비로소 진정한 혁명의 시작이다. 위에서부터가 아니라 아래로부터라는 기본을 다시 상기해야 한다. 모아진 힘에 대해서 선입견으로 억측을 부리지 마라. 모일 수 있는 동기가 무언지 살펴서 그 동기로 모인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이 원하는 사회를 만들어 나가야한다. 이제 사람들이 연호하는 대한민국, 신나는 대한민국을 만들어야 한다. 아니 만들어 나가게 도와주어야 한다. 위에서부터의 시도로 망가진 것들을 아래에서부터 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어야 한다. 이제 정치권에서 껍죽대며 과거 "꿘" 경력이나 늘어놓던 것들은 자신을 반성하고 아래에서 외쳐대는 대한민국의 함성을 들어야 한다. 처음으로 돌아가 젊은 날 외쳤던 대한민국이 지금 여기 이 젊은이들이 외치는 대한민국과 다르지 않음을 마음으로 들어야 한다. 붉은 함성 가운데 담겨 있는 그들의 애국심을 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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