괜찮습니다.
물론 까만 글자들과 하얀 여백의 사이에서만 나오는 시를 추구하는 분들에게는 여러가지 지적할 문제가 있을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시가 시인이나 고급독자 만의 전유물로 전락하는 퇴행의 길을 걷지 않으려면 대중에 대한 배려를 잊지 말아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시의 궁극적 기능 중 하나가 누군가에게 희망을 심는 일이라고 한다면 대중이 대상일 수 밖에 없습니다. 뼈를 깍는 고통도 아름다움으로 승화시켜 나가는 시인의 고단한 여정의 끝이 다만 본인과 몇몇의 사람들만을 위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게 가능하게 할 것인가, 이것이 여전히 문제로 남아있는 상황에서 윤성택 시인의 시화와 영상시에 대한 관심은 매우 긍정적인 의미를 갖습니다. 첫째, 대중들이 흔히 접하고 있는 매개를 활용한다는 점에서 시대에 대한 적응의 의미와 하기에 따라서는 앞서가 주도할 수도 있는 가능성을 제시하고, 둘째, 대중이 쉽게 접할 수 있게 한다는 점에서.
새로운 스타일로 시대의 감성을 포착하고 해명하고 또다시 새로움을 추구하는 시의 본질에 충실한다는 것과 대중에 대한 배려를, 물과 기름으로 충돌시키는 분들이 간혹 있는 현재의 상황에서, 윤성택 시인의 시도들은 용기로 평가될 수도 있습니다. 물과 기름이 아니라, 물과 반드시 물이 있어야 가능한 청량음료의 관계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저는 오래 전부터 꿈꾸던 일이 하나 있습니다. 라면공장에서 일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때 함께 일하던 임시직 노동자들의 가난한 가계생활과 문화로부터 소외된 쓸쓸한 술자리들을 경험하면서, 가난하거나 부자이거나 모두가 스스로의 삶을 소중히 생각하는 계층과 계급을 초월한 공동선이 추구되어야 한다고 알게 되었습니다.
라면박스에도 시가 새겨져 있으면 좋겠습니다. 라면봉지에 맛 있게 드시고 우리 모두 맛있게 살아요, 메시지가 있는 시도 좋고 맛에 대한 순수시도 좋으니 시가 있으면 좋겠습니다.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은 아니지만 의식의 장벽은 분명히 존재하는 이 상황에서, 중요한 점은 시인은 대중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윤성택 시인의 점점 넓어지고 있는 시도들을 보니 기존 시인들에게 약간의 비판거리가 보이고, 시가 본연의 기능 중 하나를 복구하기 시작했다는 걸 알겠습니다.
다만 이런 생각은 듭니다. 영상과 음악과 텍스트를 동시에 감상하는 것도 좋은데, 텍스트 만을 원하는 독자들을 위해서 텍스트만 따로 읽을 수 있도록 작은 버튼을 적절한 위치에 배려해주면 더욱 좋겠습니다. 영상시는 마음을 차분하고 편안하게 하는 장점이 있지만, 텍스트만의 긴장감을 느끼고 싶어하는 사람들도 있으니까요.
- 개인적으로 저는 요즘 시가 뭔지 또 흐트러져서 여기저기 사이트나 돌아다니며 헤매고 있습니다. 그런 배고픈 여정에 허기를 채워주는 [감]이 있어 떠도는 게 버릇이 되면 어쩌나, 별 걱정을 다 해봅니다.
에고, 말이 길어졌습니다.
수확이 많은 가을이기를 바라며 이만...
>
> <font size=2 face=바탕>
>마음의 시화를,
>마음의 영상시로 바꿔서 연재할까 합니다.
>괜찮을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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