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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가을.

2003.08.28 13:29

김솔 조회 수:195 추천:4

늙은 신호등일수록 파란 신호보단 빨간 신호를
더 자주, 그리고 더 오랫동안 들고 있는 것 같습니다.
투명한 빗줄기이기도 한 햇살은 멈춰선 자들을 조급하게 만듭니다.
선천적으로 다리를 저는 여고생과 나란히 섰습니다.
해수병에라도 걸렸는지 오토바이는 연신 가르랑거립니다.
샌드위치(Sandwich)로 아침을 때우는 자들은 손목에 매달려 있는
Sand watch(모래시계)를 연신 확인합니다.
도시에 사는 사람들의 입속에서 모래가 발견되는 것은
사막에서처럼 풍식風蝕을 경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늙은 신호등은 자신이 한때 오동나무였다고 고백합니다.
오동나무는 원래 속이 비어있는데
열 번을 잘라내어야 비로소 양재良材가 된다는군요.
그렇다면 늙은 신호등은 얼마나 오랫동안 허리를 꺾었던 것일까요?

요즘 눈병에 걸려 고생을 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망막 위에서 눈부처로 아로새겨져 있었던 누군가가
심하게 앓고 있거나 죽어 부패하고 있나 봅니다.
그렇다면 치통은 치열 사이에 낀 언어들이 다투고 있기 때문이겠죠.
너무 오랫동안 앉아 있어서 무릎이 옹이로 퇴화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또, 카프카의 꿈을 꾸었습니다.
1978년, 머리가 하얗게 샌 그가 한국 어느 대학을 방문하였고,
제가 친구와 그곳에 있었습니다.
한 책상 위에서 작은 규모의 좌담회도 가졌습니다.
여자 통역이 그를 따라다니며 독일어로 묻고 답했는데,
신기하게도 시간이 지나자 그의 말을 거의 다 알아들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통역은 그가 어머니와 잘 지내고 있다고 귀띔했습니다.
친구는 그에게 내 글들을 보여주라고 말했습니다만
저는 부끄러워서 그럴 수 없었습니다.
여러 가지 질문을 했었는데, 마지막 질문만 생생히 기억납니다.
제가 묻기를, “왜 자살하지 않으셨죠?”
그러니까, 그는, 그 질문은 너무 많이 받아서 대답하기 귀찮다고 말하면서,
자신이 삶과 작품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세 가지 것들을 독일인 특유의 딱딱한 영어로,
“Love, Beauty, G-public."이라고 말해주었습니다.
“G-public이라고요?”
그가 그 뜻을 설명해주긴 했는데 지금은 전혀 기억나지 않았습니다.
다만, G라는 문자는 자신이 혐오하는 단어들의 공통점이었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꿈에서 깨기도 전에 저는 그 ‘사건’을 글로 풀어낼 준비를 했습니다.
어떻게 1978년이 가능했는지, 도서관에서 책을 찾다가 잠에서 깨었습니다.
정신을 차리고 나니 꿈들을 복원하는 건 부질없는 짓이라고 생각되었습니다.
자신의 글은 오직 <쓰여지기> 위해서만 존재한다던 카프카의 말처럼,
카프카가 나오는 꿈 역시 제겐 <꿈꾸기> 위해서만 존재할 뿐입니다.

문학이 삶을 극복할 수 있을까요?
절대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
왜냐면, 문학은 삶의 자리 위에 누워서 꾸는 꿈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그 고귀한 가치를 폄하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꿈도 엄연히 현실이니까요.

잠자리는 살아있는 화석입니다.
가끔은 그들의 춤사위 위에 가만히 눕고 싶습니다.
한 인간의 삶이 화석으로 남기 위해선, 어쨌든,
현실적인 시간을 견뎌내야 합니다.

가을이 되면,
말을 줄이고, 글을 줄이고, 술을 줄이고, 영화관이나 미술관도 줄이고,
구석진 곳에 오래된 빨래처럼 처박아 두었던 삶을 챙겨볼 작정입니다.
주택 청약 통장도 하나 만들고, 주식 현황도 살피고, 운전면허 시험도 보고, 헬스장도 다니고, 할인마트 앞에도 기웃거리고,
그러기 전에 맞선부터 봐야하지 않을까요?

그래도 가을이 가기 전에,
<오노 요코전> <피카소 판화전> <램브란트전> <이정식, 나윤선 재즈 공연>
그리고 헤이리 밸리에서 10월 초에 열린다는 행사는 꼭 챙길 겁니다.
가끔은 당신에게 초대장을 보내겠습니다.
현실적인 시간이 허락하지 않으시다면,
아주 평화로운 방법으로 거절해 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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