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묘목업자에게 그런 이야기를 해보았다. 나무는 마음껏 자랄 수 있도록 거의 무한대의 공간을 주위에 확보해 딱 한 그루만 따로 심어놓았을 때만 멋지게 자란다고 그는 분명하게 말해주었다. 그렇다. 나무들은 서로 증오한다. 나무는 좋은 의미에서 개체주의적이고 고독하고 에고이스트다. 이렇게 하여 나는 밀림이 방사하는 고통을 이해할 수 있었다. 숲이야말로 집단 수용소의 강제적인 혼잡 그 자체다. 밀집해 자라는 나무들은 고통스러워하고 서로를 미워한다. 숲 속의 공기는 그 식물적 증오로 가득 차 있다. 산책자들의 폐에 달라붙어 가슴을 답답하게 하는 것은 바로 그 증오다. 매우 오래된 속담에 나무들은 숲을 보지 못하게 한다는 말이 있다. 그러나 숲은 나무들을 보지 못하게 한다는 말도 있어야 하지 않을까?” -미셀 투르니에, <예찬> 중 ‘나무와 숲’에서
지난 금요일에 서울로 출장을 다녀왔습니다.
일이 생각보다 일찍 끝나서 오래된 사람과 술 약속을 하고,
새로 생긴 강남역의 교보문고 안을, 평일 오후에,
마치 산림욕을 하듯이, 느리게 어슬렁거렸습니다.
서점은 거대한 미노타우로스를 가둔 미궁입니다.
그렇다면 나는 기꺼이 그에게 바쳐진
7명의 소년과 7명의 소녀 중 하나가 되어 괴물을 기다립니다.
단숨에 나를 삼키는 단 하나의 거대한 책.
그것은 아마도 자작나무의 살로 만들어졌을 것입니다.
그 나무를 기어 올라간 샤먼들은 신들의 진실을 구해오곤 했습니다.
“다음날 아침 사람들은 특정한 장소에 자작나무를 하나씩 놓는다. 그리고 입문자의 천막인 ‘유르트’ 중앙에, 베어 낸 나무들 가운데 가장 단단한 것을 고정시킨다. 나무의 뿌리는 아궁이 속에 넣고 그 꼭대기는 굴뚝을 통과하도록 한다. 이 자작나무는 샤먼이 하늘로 들어가는 입구를 열어주기 때문에 ‘문지기’라는 의미의 ‘우데쉬 부르칸Udeshi burkan’이라고 이름 붙여진다. 나무는 언제나 천막 속에 있을 것이며, 이는 입문자가 현재 천막 안에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번에는 이곳이 ‘세상의 중심’이 되는 것이다.”-자크 브로스 <나무의 신화>에서
작가는 여전히 영매靈媒여야 합니다.
그런데, 반거들충이에 불과한 나는 숲에서 여러 번 길을 잃습니다.
숲의 성실한 관리인들은 어디서 그런 책들을 발견해 그곳으로 옮겨오는 것인지,
나는 왜 아직도 도스토예프스키를 읽지 못하고 있는 것인지,
왜 번역가들은 카프카의 판본을 새롭게 만들어내는 것인지,
어떤 책은 모든 책의 반영이며, 모든 책은 어떤 책에 모두 실릴 수 있어서,
결국, 책이란, 오로지 책에 대한 책일 수밖에 없다는 주장이 맞는다면,
나는 도스토예프스키를 읽지 못했다는 이유만으로도,
단 한 권의 책도 완전히 읽어낼 수 없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마치, 생물학자들이 아마존의 밀림 속에 들어섰을 때,
그의 폐에 달라붙는 답답함이 이와 같지 않을까?
그리고 서로 몸을 부비고 있는 책들도 서로를 증오하고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
게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는데,
“세상의 모든 서점에는 적어도 단 한 명의,
시인, 소설가, 평론가, 시나리오 작가, 음악가, 미술가, 사진사, 서지학자, 출판업자, 도서관사서, 아니면 신문기자라도, 반드시 숨기고 있지 않을까?”
그래서 그들이 서로 내뿜는 증오 혹은, 긴장감 때문에,
서점 안을 ‘산책하다’ 보면 답답해지는 건 아닐는지.
그러니까, 서점은 설령 도시가 아니라 두메산골에 존재하더라도,
그 안에서 산책하는 자들은 하나같이 답답함을 느낄 것이라는 생각.
결국 보르헤스 한 권 사서 들고,
약속시간보다 한 시간이나 일찍 그곳을 빠져나왔습니다.
그리고 금요일 밤 거리를 가득 메우며 걸어가는 사람들 속을 걸으면서,
나는 그들이 모두 작가가 아니라는 사실에 한없이 유쾌해 졌습니다.
그러느라 취하는 줄도 몰랐습니다.
버스 운전사가 나를 흔들어 깨웠을 땐
그곳은 불 꺼진 시내버스들만 널려있는 서울의 어느 위성 도시의 하차장이었습니다.
“나는 불 속에 던져버릴까도 생각했다. 그러나 무한한 책의 소각은 똑같이 무한한 시간이 걸려 지구를 연기로 질식시켜 버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히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나는 나뭇잎을 숨기기 위한 가장 적합한 장소는 숲이라는 구절을 읽었던 기억이 났다. 나는 은퇴하기 전 90만 권의 책이 소장되어 있는 국립도서관에서 일했다. 따라서 나는 입구 오른쪽에 신문과 지도를 보관해 놓은 지하실로 뚫려 있는 굽은 층계가 있다는 것을 안다. 나는 축축한 서가 속에 <모래의 책>을 잃어버리기 위해 사서들이 한눈을 팔고 있는 틈을 이용했다. 나는 출입구로부터 어느 높이, 어느 정도의 거리에 그 책을 두었는지 기억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보르헤스, <셰익스피어의 기억> 중 ‘모래의 책’에서
2004.2.9 김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