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작품은 오늘 저녁 kbs tv문학관에서 박범신의 소설 [외등]을 원작으로 상영화된 작품을 보고 올리는 글임입니다. 방송은 방송사 홈페이지에 가면 다시 볼수 있을 겁니다. 황순원의 [소나기]에 이어 부럽지 않은 한국문단의 아름다운 작품을 다시 접하게 되어 뿌듯한 이 저녁, 오늘 밤 잠 못 이룰것 같은 기분이 드는군요.
여러분들도 함께 바져 보시길...
아래의 내용은 작가가 절필을 선언하고 작품을 완성한후 인터뷰의 내용인 것 같습니다. 작품을 감상하시는데 배경 지식이 될까 싶어 이렇게 올려 봅니다.
[저자와의 만남] '외등' 박범신
[시티라이프 2001-06-07 13:46]
남가좌동에 위치한 명지대 캠퍼스. 이곳에서 10년째 후배 양성에 힘써온박범신 씨의 방은 학생회관 건물 8층에 있다. 오십줄을 반 가까이 넘긴 그의 얼굴은 가무잡잡하지만 생동감이 넘친다. 오랫동안 묵혀 놓았던, 그래서 일종의 부채감에 시달렸던 인물과 사건을 되살려내마침내 세상에내놓았기 때문일까. 그는 한없이 편안하고 자유로워 보인다. 이웃집 아저씨같은 털털한 웃음은 때마침 창가로 새어 들어온햇빛 때문인지 찬란해 보이기까지 한다.
책장의 한 쪽면에는 지난 해 히말라야 트레킹 도중 만난 네팔여인과 더불어 그가 환하게 웃고 있는 사진이 붙어 있다. 이미 두 차례 히말라야를 다녀왔다는 그는 "히말라야는 사람을 본성으로 돌아가게 하고 정화시킨다"며 "산 밑을 끊임없이 걷다 보면 우리가 너무도 하찮은일들에 연연해하고 상처받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고 말한다. 그는 올 겨울에도 등반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
그는 최근 8년간 책상 서랍 속에 묵혀 두었던 소설을 완성해 출판했다.
'외등'(이룸)은 그가 지난 93년 문화일보에 연재하다 중단했던 소설이다. 당시 그는 "권총을 뒤꼭지에 대고 쓰라고 해도 오늘부터는 단 한 문장도 쓸 수 없다"며 '절필 선언'을 했다. 그리고 그로부터 2년8개월간 그는 정말 단 한 줄의 글도 쓰지 않았다. 침묵의 기간 동안 그는 용인의 한적한 시골로 거처를 옮겨 일체의 사회생활을 포기하고 농사를 지으며 칩거했다.
70~80년대 한국의 문단을 리드하며 베스트셀러 작가로 전성기를 구가하던 그가 돌연 절필선언을 한 것은 그 자체가 하나의 사건이었다.이에 대해 그는 "도대체 사는 것이 무엇이고, 내가 문학을 바르게 하는 것인지에 대한 의문이 들었고, 그것이 나를 압박해 더 이상 글을 쓸 수 없었다"고 회고한다. 사춘기에 겪는 방황과도 같은 갈등과 고뇌가 그를 뒤흔들어 놓았던 것이다.
"삶의 본질적인 의구심이 날 옭죄었어요. 작가로서 얻어낸 상업적인 기득권을 짊어지고 있는 한, 삶이나 문학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에 답을 찾을 수 없다고 생각했지요. 그래서 베스트셀러 작가라는 기득권을 반납하고 본래의 나로 돌아가는 시간을 가져야겠다고 판단한 거에요. 물론 다시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삶에 대한 근본적인 해답을 얻은 것은 아니지만요."
그가 다시 문단에 돌아온 것은 96년이다. 긴 침묵 끝에 중편 '흰소가 끄는 수레'(문학동네)를 가지고 다시 독자들을 만났다. 다시 돌아올 수밖에 없었던 것은 '쓰지 않고는 도저히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다.
<>"세월 지나도 사랑의 원형은 변함 없다는 걸 얘기하고 싶었어요"<>
그가 중단했던 소설을 8년만에 마무리해 최근 출판한 '외등'은 70년대부터 90년대를 아우르는 파란만장한 현대사의 질곡을 배경으로 한세 남녀의 엇갈린 사랑을 그리고 있다.
사춘기 시절부터 30여년간 처절하면서도 질긴 인연의 끈으로 맺어진 서영우, 민혜주, 노상규가 주인공이다. 이들 세 사람은 저마다 한국 현대사에 드러난 전형적인 인물로 설정된다. 혁신계 아버지를 둔 서영우는 운동권에 투신하고, 정신대 출신의 어머니를 둔 민혜주는 사랑하는 서영우 대신 노상규와 결혼하면서 고통스러운 삶을 산다. 일제시대 미곡상회로부터 시작해 해방 후 대성방직과 대성건설 그리고 대성그룹으로 날로 성장한 거대 재벌의 아들인 노상규는 그토록 갈망했던 민혜주를 아내로 맞아들이지만 민혜주가 서영우의 아이를 가졌다는 사실을 알고 그녀를 불행으로 몰고 간다. 오랜 세월 짝사랑하던 여인을 가졌지만 마음까지 얻지는 못했다는 좌절감 그리고 서영우에 대한 불타는 질투심은 자신 또한 망가뜨린다.
소설을 읽다 보면 '외등'이 단순한 사랑이야기가 아님을 알게 된다. 역사적 사건들과 주변 인물들에 대한 묘사가 너무도 사실적이기도 하려니와 세 주인공들의 관계나 이야기가 펼쳐지는 양상이 심상찮다. 소설에는한국의 재벌이 어떻게 잉태되고 성장했는 지, 정신대를 겪은 한국의 여인들이 어떤 고통을 받으며 살아가고 있는 지, 혁신계 인사들이 어떤 핍박 속에 몰락했는 지가 상당히 사실적으로 그려져 있고, 삼성그룹의 사카린 밀수입 사건, 71년 부정선거, 유신헌법, imf, 김대중 대통령 당선 등 역사적 사건들이 밑바탕을 이루고 있다.
주인공들의 슬픈 사랑이야기는 그 위에서 물고기처럼 펄떡인다. 힘과 권력, 재벌을 상징하는 노상규에게 평생 저자세인 것처럼 비춰졌던 서영우가 민혜주가 사라진 병상이 바라다 보이는 산 중턱에 외등을 켠 채로 자살한다는 설정은 부정과 비리 앞에 결코 굴하지 않는 '순수'를 상징한다. 그는 노상규와 노상규 집안으로 대표되는 세상의 부조리를 향해 '무언의 항거'를 한 것이다. 또 비인간적 처사와 축재, 권력 밀착형 비리를 일삼어온 대성그룹이 종국에 침몰하고 노상규마저 수감되는 설정에는 정치와 사회를 바라보는 작가의 시각이 날카롭게배어있다. 흡입력 있는 이야기 구조 속에서 더욱 원숙해진 작가의 인생관을 엿보는 것도 어렵지 않다. 박씨는 궁극적으로 독자에게 무엇을 전달하고자 했던 것일까.
"쓰고 싶었던 건 러브스토리예요. 세월이 지나도 사랑의 원형은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었지요. 우리의 삶이 시대나 역사와 무관할수는 없잖아요. '외등'을 피륙에 비유하면 70년대부터 90년대까지의 역사는 소설의 씨줄이고, 세월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원천적인 사랑은 소설의 날줄인 셈이에요. 하지만 원래 의도한 대로 만족스럽게 되지는 않았어요. 80년대와 90년대가 제대로 복원되지 않아 소설의 무게 중심이 70년대인 것처럼 되어 버렸지요."
그는 이번 소설 말미에 붙인 '작가의 말'에서 "잘가라, 나의 전근대여'라고 적었다. 문학적 산문으로써의 전근대를 말하는 게 아니고 이 소설이 자신의 문학인생에서 전반기 한 시대를 끝마침하는 작품이라는 의미다. 93년 이전이 박범신 문학1기라면, 다시 소설을 쓰기 시작한 96년 이후는 박범신 문학 2기인 셈이다. '외등'을 출판한 후 착잡한 기분이 드는 것은 정말 해야 할 일을 한 것 같은 후련함 이면에 작가 자신이 과거로 되돌아간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박범신문학 1기와 2기, 그 차이점이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굳이 달라진 점이라면 전에 난 소설이 세상과의 하나의 싸움이라고 생각하며 살았어요. 다시 말해 세상과 맞서는 것이 나의 문학이라고 여겼지요. 그런데 절필 후 3년간 소설을 안쓰면서 뚜렷하게 깨달은 바가 있어요. 문학이 세상과의 싸움이 아니라, 세상과 사랑을 위한 소통의 길을내는 것이라는 거에요. 그런 점에서 '외등'은 문학이 세상과의 싸움이라고 생각한 끝물에 쓴 거에요. 그래서 마음이 개운하지만은 않아요."
8년간 서랍 속에 갇혀 있는 미완성의 소설 분량은 1,700매였다. 이 중 700여 매를 솎아내고 300여 매를 새로 썼다. 그의 계획은 1,000~2,000매쯤 더 쓰려고 했던 것인데, 결과적으로 오히려 400매를 더 줄어든 셈이다.
"70년대와 80년대 그리고 90년대의 30년 역사를 정밀하게 복원해 내려고했어요. 그것이 관통하고 있는 장대한 시간을 엮으려 했던 것이지요. 그런데 정밀하게 역사적인 사실들을 복원해 내기 어렵다고 판단해 오히려 그것을 도려낸 거에요. 역사적 사실에 주인공들과 관계되고 전개되는 양상들, 사회사적인 면, 그런 면들을 대부분 솎아내고, 러브스토리가 중심이 되도록 재구성했어요."
<>"3년의 절필기간 동안 내 안에 이야깃거리가 넘쳤어요"<>
앞서 언급했듯이 93년 절필 선언 후 그는 용인에 내려가 생활했다. tv도, 신문도 보지 않았다. 그나마 세상과 소통할 수 있는 도구라고는오래된라디오 하나 뿐이었다. 150여 평의 텃밭에다 오이 감자 고구마 상추 쑥갓 아욱 등 밥상에 오를 수 있는 갖은 야채를 심으며 소일했다. 번잡스러운 세상에서 그리고 베스트셀러 작가라는 위치가 주는 강박적인 굴레에서 벗어나면 여유로우면서 고요한 평화가 찾아올 것이라고 예상했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못했다. 번민만 더 깊어졌다.
"절필 선언 후 6개월 간은 어떻게 할 바를 몰랐어요. 내가 안쓰겠다고 해놓고, 마치 세상이 못쓰게 한 것처럼, 원망하고 한숨 지었지요. 세상에서 쫓겨난 기분이었고, 관 속에 누워 있는 느낌이었어요. 그러던 것이7개월 정도 지나니까 독성이 조금씩 빠지면서 마음이 편안해지고, 내가 선택한 것이 옳았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쓸쓸한 평화를 즐기기 시작했지요. 하지만 이것도 그리 오래 가지는 않더군요."
3년이 다 되가면서 그는 다시 '쓰고 싶은 열망'에 몸이 달아올랐다. 텃밭에 나가 풀을 뽑고 있으면서도 중얼거리는 일이 잦았다. 무심결에 자신의 중얼거림을 깨달은 그는 자신의 입을 통해 튀어나오는 말이 어느덧형체를 띠기 시작한 새로운 소설의 문장들이라는 것을 자각했다. 우물이넘치면 물이 넘쳐 흐르듯이, 그의 안에는 새로운 이야기들이 꿈틀거리며세상에 나오고자 아우성쳤다.
"절필 무렵 내게 닥친 가장 큰 문제는 삶의 유한성에 대한 자각과 글쓰기란 무엇인가에 대한 의구심이었어요. 그런 문제들이 3년 지났다고 해결되는 건 아니지만 소설로 말하고 싶은 것들이 내 안에 꽉 차 있는 걸 느꼈어요. 쌓여 넘치는 걸 써내는 것이 오히려 내가 만난 질문에 대한 해답을 뚜렷하게 볼 수 있는 한 방편이 되지 않을까 생각했지요. 그래서다시 쓰기 시작한 거에요."
그래서일까. 97년에 나온 창작집 '흰 소가 끄는 수레'와 99년에 나온 장편 '침묵'은 그 원형적 의문에 대한 존재론적 탐구이다.
그는 요즘도 일주일에 한 차례씩 용인에 내려가 지낸다. 주로 수업이 없는 목요일에 내려가 일요일 오전에 올라온다. 어느 사이인가 인이 박혔는 지 집필도 그곳에서만 가능하다. 텃밭은 그가 너무 놀려서인지 누군가가 고추를 심어 놓았다고 한다. 땅주인에 대한 배려인 듯 두 줄만 남겨 놓았는데, 박씨는 거기에 모종낼 생각이다. 씨를 뿌리기에는 시기적으로 너무 늦었기 때문이다. 그곳에는 주말이면 가끔 제자들이 내려와서밥을 해먹고 가기도 한다. 늦은 밤, 쏟아지는 별빛 아래에서 제자들과 더불어 문학과 삶에 대해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어느새 여명이찾아오곤 한다.
<>소설성 회복에 도움 주는 리얼리즘 계열의 작품 쓸 계획<>
73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단편 '여름의 잔해'가 당선되면서 등단한 박씨가 그 동안 주로 다뤄 온 소재는 기형적으로 성장한 한국근대사회에서소외된 계층의 삶이다. 성장신화의 그늘에 가려져 개인의 삶이 어떻게 왜곡되어가는가를 특유의 감성으로 담어내 독자들의 사랑을 받아왔다.
그 대표적인 작품이 80년대를 풍미했던 '물의 나라' '불의 나라' 등이다. 창작집 '향기로운 우물이야기'에 1, 2편을 실었고, 현재 3편을 집필 중인 '들길' 연작도 농촌부락에 살고 있던 한 가족이 근대화 과정에서 해체되는 이야기이다. 소설은 1943년부터 시작하고, 소설 속에서 근대화는 점차 변화되는 '길'로 상징된다.
"농두렁길이 먼지가 나는 신작로가 되고, 아스팔트가 되고, 철로가 놓이고, 마침내 오늘날에는 비행기길이 세계의 중심이 되었잖아요. 길을 넓히고 더 빠르게 가는 운송수단이 생기는 것이 근대화를 상징한다고 할때, 그렇다면 그에 따른 우리의 삶도 그만큼 풍요로워졌는가에 대해 의구심을 갖는 작품이에요. 소설은 길이 넓어지고 빠른 운송수단이 생기면서오히려 점차 와해되는 가족의 이야기를 그림으로써 근대화와 진정한 의미에서의 삶의 풍요로움이 비례하지 않는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어요."
박씨는 올해로 작가로서의 인생 29년째를 맞이했다. 이 시점에서 그는 문학에 대한 애증을 표현한다. 짝사랑에 열병을 앓다가, 함께 사랑을 나누며 행복해했으며, 어느덧 싫증이 나 멀찌감치 도망치고 싶었으나 다시되돌아 올 수밖에 없는 늙은 조강지처의 품처럼, 문학은 그에게 젊은 시절 희열의 대상인 동시에, 때론 벗어나고 싶은 고통의 산물이다. 그가 기자에게 "나 다음 생에서는 문학 안할 거에요. 서태지나 h.o.t같은 가수나 화가 할 거에요."라고 농담처럼 툭 던진 말에서도 문학에 대한 그의 심정이 읽히는 듯 했다.
"그래도 평생 글을 쓰며 살아온 것을 후회하진 않아요. 어떤 의미에서 문학은 내게 방부제 역할을 했기 때문이에요. 내가 만약 문학을 안했다면 어쩌면 썩은 삶을 살지 않았을까 생각하곤 해요. 옳지 않은 일을 하며 살았을 지도 모르고…. 어떤 것이 바른 삶이고, 깨어있는 삶일까 하는 의문을 한시라도 잊고는 문학을 할 수 없거든요. 젊은 시절 속눈썹이길던 그 곱던 얼굴은 간데 없고 피로에 지친 중년여인이 된 내 아내처럼문학은 내게 오랜시간 함께 해온 데서 오는 연대감이 있어요. 이 생을 마감할 때까지 내 아내와 동거동락하듯, 문학도 계속할 거에요."
그는 "청년작가로 살고 싶다."고 피력한다. 권위주의 갑옷을 입고 있다거나 일정한 문학세계에 안주해 있지 않지 않겠다는 다짐이다. 과거 자신이 쓴 것을 아프게 부정하고, 새로운 도전, 새로운 형식, 새로운 주제를 찾아서 늘 비상하겠다는 얘기다. 예술가란 자고로 자신을 항상 불안한 위치에 놓아야 새로운 것을 창조할 수 있다는 게 그의 신념이기도 하다.
당분간은 소설성의 회복에 도움을 주는 작품에 주력할 계획이다. 젊은 작가들에 의해 소설의 지평이 넓어진 것은 사실이지만 너무 이미지 중심이고, 지나치게 파편화되는 개인의 감수성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는 점이아쉬움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그는 "소설은 서사"라고 생각한다.
"예전 소설들은 읽은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도 이야기를 전해줄 수 있었어요. 그러던 것이 90년대 들어서면서 지나치게 이미지화된 소설들이 주류를 이루게 됐지요. 다른 사람에게 소설의 줄거리를 이야기하는 것이 어려울 정도로 서사가 없는 작품이 많아요. 그래도 소설은 이야기 아니겠어요? 그런 차원에서 당분간은 리얼리즘 복원에 관계되는 소설을 써 우리 문학의 이야기성을 회복하는데 힘쓸 생각이에요."
인터뷰가 진행되는 도중 몇 명의 학생들이 자신이 작문한 소설을 들고 박씨를 찾아왔다. 그는 "후배들을 가르치는 일이 즐겁고 보람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자신에게 수업을 듣는 학생들을 제자라는 개념보다 동반자적인 때론 좋은 의미에서의 라이벌 관계라고 생각한다. 젊은이들보다 먼저 이 길을 걸어왔기 때문에 그들이 시행착오를 줄일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위치일 뿐, 결국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같은 길을 걷는 거라고 말한다. 진정한 문학청년의 모습을 다시금 확인할 수 있는, 함축적 의미가 담긴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소설 '외등'의 마지막 문장, '나는 꿈 속에서 목련나무에 걸린 등불들이, 세상 끝까지, 산과 강과 도시를 넘어, 도미노로, 환하게, 만개한 목련꽃처럼, 제 가슴의 외등을 일제히 켜드는 것을 오래오래 보고 있었다'처럼 기자는 박씨의 작품들 역시 우리의 가슴을, 세상을, 삶을, 환하게 밝혀 줄 것이라고 마음 속으로 살며시 읊조려 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