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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발은 걸음에 닳는 것이 아니다. 그저 걸음을 기억할 뿐이다. 딛는 면에서 닳아 사라지는 쪽과 닳도록 걷는 쪽 사이로, 나는 밀려가는 중이다. 신발은 생활이 그대로 찍힌 일종의 지문인지도 모르겠다. 그 닳은 면이 삶의 비문이라고.
걷고, 때로는 달려서 닳은 신발 뒤축을 현관에 앉아 자꾸 들여다보게 된다. 신발을 바꿔야 하지 않을까. 닳는다는 건 나를 돌아보는 일이지만, 신발이 이제 나를 벗어나도 되겠다는 마모 앞에서는 더 이상 부정하지 못한다. 그게 생각보다 홀가분해서 스스로 계면쩍어지기도.
에스컬레이터를 오르다 보면, 앞사람의 신발 뒤축에 눈이 갈 때가 있다. 그 사람이 닳아온 여정을. 무게를 받아낸 면이 삶을 견뎌왔던 거라고. 안쪽으로 꽤 닳아 허름한 채로 걷는 그를, 나는 맨발로 뒤를 좇는 것 같아서.
신발은 몸의 편애를 그대로 드러낸다. 삶의 기울기를 견뎌냈던 수많은 날들. 신발이나 나나 낯섦을 견디는 시간이었을 테니. 이렇게 함께 닳아가고 있다는 위안. 문득, 적응하거나 타협하지 못한 것이 오히려 불안했던 건 아니었는지.
조명이 환한 매장, 누군가처럼 의자에서 새 신발을 신어본다. 뒤꿈치까지 밀어 넣고 발가락을 몇 번 꼼지락거리다가 흘깃 보게 된다. 옆에 벗어놓은 초라하게 낡은, 신어 온 신발. 차마 버릴 수는 없는 거여서 오늘은,
네가 나를 어디든 데려다주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