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롱패딩

2025.12.03 14:30

윤성택 조회 수: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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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파 예보인 줄 알았는데, 하룻밤 사이에 10도 차이가 난다는 건 그냥 일방적인 통보다. 아침에 창문을 여니 냉동고에 넣어둔 피자 향이 난다. 이런 식으로 12월을 지난다면 겨우내 전자레인지를 돌리는 태양은 퍽이나 효율이 좋다는 생각. 롱패딩을 꺼내 지퍼를 끝까지 올려본다. 너무 올려 입술에 깃이 닿는 순간, 한파가 감옥 같아졌다. 폭신하고 두툼한 게 몸이 겪어야 할 형량이리니.

 

손을 주머니마다 집어넣어 본다. 막 나온다. 마스크, 작은 김서림 방지 안경 클리너 3, 안쪽 깊이 영수증 하나. 이것은 마치 지난겨울이 나를 잊지 않았다는 물증 같다. 그러고 보니 비탈에서 미끄러졌던 스릴감이 아직도 패딩 엉덩이에 희미하게 묻어 있다. 마음도 그러할까. 감정이 칠해진 과거가 현재에 닿았을 때 옮아 묻는 거.

 

GTX에서는 엘리베이터를 빨리 타는 게 티켓값을 현명하게 누리는 거다. 한 발 늦으면 커피 한 잔을 손해 본 느낌이다. 지하 50미터에서 쑤욱 솟구쳐 오르는 엘리베이터 안, 바삐 뛰어와 숨을 고르다 보면 보인다. 각자 다른 종류의 겹을 두르고 있는 사람들. 인조털의 윤기, 유명 브랜드 로고, 세탁 세제 냄새, 눈을 감으면 순장(殉葬)이란 이런 걸까 싶다.

 

주머니에서 나온 영수증은 설렁탕집의 것이었나. 골목을 지나는데,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라는 현수막 너머에서 내부를 뜯어내고 있다. 가무잡잡하지만 눈빛 반짝이던 아르바이트생 인도 아가씨, 팔뚝에 문신이 있던 주방장, 다 어디로 떠났나. 안쪽 주방에는 빈 그릇들이 그대로 남아 먼지를 담아내고 있다. 이제는 마음속에서만 성업 중일 식당.

 

사람도 그렇다. 누구나 마음속에는 포근한 패딩 안처럼 수감 중인 온기가 있다. 추억에도 만기(滿期)가 있다는 건 공공연한 사실. 나는 왜, 롱패딩을 입고 눈밭에서 뒹굴고 싶을까. 무기(無期)의 형량, 간간이 면회 와 주는 눈빛을, 고맙다. 인생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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