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윤성택 시인께

2004.03.08 22:52

김언 조회 수:258 추천:1

안녕하세요. 부산에 사는 김언입니다.
늘 지면으로만 뵙다가 이렇게 직접 인사드리기는 처음이네요.
그 동안 자주 들락날락했습니다만, 제 행색이 워낙 유령이라서
흔적은 없었을 겁니다. 조용히 들어왔다가 조용히 시 몇 편
훔쳐가는 게 고작이었으니까요. 간혹 제 시도 눈에 띄길래
반갑기도 하고 고맙기도 하고 그때마다 인사드리려니 꼭 뭔가를 들킨 기분이라서
그냥 사라지고는 했답니다. 고마울 따름입니다.

오늘 들어와보니 또 모자란 시 한 편이 올라와 있더군요.
발표하고 여러 가지로 찜찜한 시였는데, 후하게 보셔서 영 실패한 시는
아니구나 그런 생각도 해봅니다. 그런데, 시가 원문과는 좀 많이 다른 것 같네요.
고쳐져서 더 좋아 보이기도 합니다만, 못난 것은 못난 그대로
그 시의 주인이 책임져야겠지요.
작년엔가 <고가도로 아래>라고 올려주신 시에도 한두 군데 원문과는 다른 곳이 있었는데,
그게 전선을 타고 여러 군데 정말, 유령처럼 떠돌아다니는 걸 보고서는
이 집의 위력을 새삼 실감했더랬습니다. 쫓아다니며 고칠 수도 없는 노릇이고 해서
오늘은 염치 불구하고 이렇게 들어와버렸습니다.

마침표 하나, 쉼표 하나, 토씨 하나에도 벌벌 떠는 사람, 시인이란 게
이렇게 소심한 종족입니다. 큰것의 너그러움은 작은것의 세심함에서 비롯된다는
믿음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부디, 이따위 갑작스런 출몰과 행동에
기분 상하지 않으셨길 빕니다.

그리고 늘 건강하시길 빌겠습니다. 갑갑한 생활이지만,
차분하고 너그러운 그 감수성(저한테는 없는 겁니다), 내내 잃지 않기를 바라겠습니다.
그럼, 이만 물러갑니다.




- 아래는, 모종의 날씨 원문입니다. 참 낯뜨겁네요.




모종의 날씨



설마, 하고 눈이 왔다
아닌가, 하고 진눈깨비 내렸다
정말이지, 하고 잠시도 내 곁을 떠나지 않았다
함박눈, 나는 먼 길에 서서 독백하는 사람과
자백받는 사람의 표정이 저러할까 싶은 표정으로 같은 하늘과
다른 구름을 지켜보았다 그는 불어왔다,
불어갔다
날씨보다 정치적인 것은 없으므로
그의 말은 믿을 것이 못 된다 일러주는
많은 밤이 거짓말이었다

설마?
하고 눈이 왔다
아니지? 하고 아지랑이 피었다
그가 어떤 모자를 썼던가?
빨간.
그가 어떤 말을 하던가?
푸른.
정말이지,
그는 내일 강연할 증거가 하나도 없다
그는 마치 그림자가 다가오듯이
나를 대한다 언젠가
사람들이 눈물을 그치었다 생각하는
오늘 같은 밤이 또 있을까?
물론.

별은 그가 반짝인다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1958 서늘한 가을물 [1] 2003.09.19 260
» 윤성택 시인께 [2] 김언 2004.03.08 258
1956 안녕하세요? [1] 김미옥 2011.06.02 257
1955 덕분입니다 [4] file 천서봉 2005.10.18 256
1954 10월의 마지막 밤 윤성택 2002.10.31 256
1953 잠바, [1] 윤성택 2003.11.14 255
1952 비밀의 화원 [2] 조은영 2004.06.09 253
1951 <b>『문학사상』 당선소식</b> [5] 윤성택 2001.11.10 252
1950 저녁 [4] 윤성택 2003.02.04 251
1949 가끔씩... [2] 김유정 2004.05.19 249
1948 혼자 보는 영화, [4] 윤성택 2003.05.21 247
1947 내 귀는 거짓말을 사랑한다 [2] 이정희 2011.01.22 245
1946 봄비 내리는 일요일 오후, [4] 윤성택 2003.03.16 245
1945 늦은 소식 [1] 김솔 2005.07.03 244
1944 고립 [3] file 천서봉 2004.12.15 242
1943 [re] <b>감사합니다</b> [6] 윤성택 2006.09.23 240
1942 혹시 저를 기억하시나요? [5] 2003.07.10 240
1941 시골 기찻길 [3] 전수빈 2004.01.22 239
1940 기별 [1] 윤성택 2003.01.13 239
1939 보류 [2] 이파리 2004.08.25 237